김치와 인연의 탑을 쌓다
메릴랜드로 와서 7층 아파트에 살게 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였다. 아이 둘과 나만 집에 있는데, 아이가 내 손을 잡고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쪼그마한 손가락 하나를 펴서 화장실 천장을 가리켰다. 천정에서 물이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뭔 일이야? 황당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엄마! 엄마!” 둘째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거실과 주방의 경계에서도 물이 줄줄 새기 시작했다.
나는 11개월 된 아이를 들쳐 안고, 세 살 된 둘째 손을 잡고 계단으로 한 층 올라가 똑똑 현관문을 두드렸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대체 뭐라고 할 생각이었을까. 거기에 맞는 영어를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문을 두드린 것이었다. 까무잡잡하고 젊은 여자가 빼꼼히 문을 열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한국 사람이세요?”
“네, 누구세요?”
그녀는 키가 컸고 늘씬한 데다 세련되고 예뻤다. 유난히 커다란 눈을 굴리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목소리는 또랑또랑했다.
“혹시, 우리 집 천장으로 물이 줄줄 새는데, 알고 계세요?”
아래층까지 물이 새는데도 모르고 있나 싶어 나는 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영어를 잘 못한다거나 민낯이었다거나 옷을 갖춰 입지 않았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다짜고짜 올라가 문을 두드린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다소 무례했다.
나는 영어도 잘할 줄 모르면서 용감하고 무식한? 아줌마였다. 눈치는 빨라서 얼굴을 보자마자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메릴랜드에 온 지 겨우 한 달쯤. 한국 사람만 보면 반가웠고 말을 걸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그녀와는 아주 불편한 첫 대면을 한 것이다.
8층 그녀는 이사 온 지 며칠 만에 주방수도가 터져서 부엌과 거실이 물바다가 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7층 우리 집까지 새는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 집 수도와 우리 집 천장 보수가 모두 마무리되고 어느 날, 발코니에 서 있는데, 또 물이 주룩주룩 떨어졌다.
“또 새는 거야?”
걱정스럽게 고개를 들었는데, 그녀와 또 눈이 마주쳤다.
“죄송해요. 발코니 청소 좀 하느라고요.”
그녀는 새침하게 얼른 대답을 던졌다. 미국 발코니는 창문도 없고 배수 시설도 따로 없어서 물이 그냥 발코니 펜스 사이로 떨어졌다.
이것이 그녀와 두 번째 대면이었다.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이 두 장면을 되새김질한다. 그녀는 까칠한 한국 아줌마가 아이 둘을 안고 올라와서 문을 두드렸고 천장이 샌다고 말했다며 깔깔댄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시작이었다고!
그리고 나는 그녀와의 세 번째 만남도 기억한다. 우리 집이었다.
주말 오후, 온 가족이 출동해 차로 10분 거리 몰에서 장을 보고 나왔다. 그런데, 차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한국에서라면 보험사를 부르면 간단한 문제였지만, 거기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 망설였다.
“배터리문제야. 점프만 하면 되는데.”
남편이 말했다. 메릴랜드 대학교 사이트에서 정보를 주고받다가 알게 된 2층 동생 부부는 주말이라 멀리 외출 중이었다. 난처했다.
남편이 학교셔틀버스를 타고 다니며 알게 된 한 남자를 떠올렸다. 한국 사람이라고 서로 인사하고 전화번호를 교환했단다. 우리는 다급한 나머지 왕래도 없고 친하지도 않았던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경을 쓴 꼬마신랑 같은 남자가 바로 달려 나왔다. 휴일이라 집에서 쉬고 있었다면서.
우리 집 시에나가 그 집 금동이 크라이슬러를 만나 서로 강한 전기를 통했다. 우리 시에나는 순식간에 시동이 걸려 살아났다.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뻥 뚫려 내려가는 것 같았다.
‘휴~ 천만다행이다.’
한두 번 마주친 인연이 휴일에 도와준다고 즉시 달려와 준 그의 마음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그런데 그가 바로 8층 그녀의 남편이었다. 띠리리~~ 깜짝 놀랐다.
8층 부부를 우리 집에 초대했다. 그것이 그녀와 세 번째 만남이다. 그리 좋지 않은 첫 만남이었지만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우리는 9년째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8층 남자는 박사 후 과정으로 메릴랜드에 왔다. 우리는 밥을 먹으며 타국에 나와 사는 사연들을 나누면서 동병상련을 아주 진하게 느꼈다. 금방 한 식구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돕고 정을 쌓다 보니 멀리 있는 가족보다도 더 나은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나보다 다섯 살 어린 동생이다. 외동딸로 자란 그녀라지만, 누구보다도 예의 바르고 마음씨가 예뻤다. 타국이라는 상황이 우리를 더욱 끈끈하게 했다. 우린 3년 반 동안 정말 연애하듯 위 아랫집을 오가며 많은 것들을 함께 했다.
“언니, 오늘 저녁은 뭐 먹어요? 비빔밥 어때요?”
“어. 좋지.”
난 밥하고 몇 가지 반찬과 김치를 준비했다. 8층 동생은 생야채와 과일, 그리고 신기한 간식 등을 챙겨 내려오는 식이었다.
한국에서 그녀의 친정어머님이 오셨을 때, 우리 집까지 어머님 손맛이 넘어왔다. 그녀가 좋아한다는 시래기무침! 세련된 그녀의 입맛은 꽤나 토속적이었다. 나는 그때 먹은 야들야들 부드러운 시래기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나는 만두를 빚고 있었다. 와인병으로 만두피를 직접 밀어 커다랗게 만든 김치 왕만두였다. 피를 만드는 것이 너무 어려워 왕만두가 된 것인데, 빈 접시를 왕만두로 채워 올려 보냈다. 그녀의 어머님은 지금도 그 김치 왕만두가 아주 맛있었다고 이야기하신단다.
한국에서는 흔한 만두고 흐물흐물 늘어진 만두피의 김치 왕만두가 얼마나 맛있을까 싶지만, 타지에서 먹는 한국 음식 맛은 흉내만 내도 감격스러운 법이다. 어머님은 사위 생일이라고 우리까지 초대해 근사한 중국집 음식을 맛 보여 주셨고 마트에서 쌀을 사 우리 집에 보내 놓고 가셨다. 그녀를 잘 부탁한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어머님은 그녀가 우리 집을 더 보살피고 있다는 걸 모르셨다.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출입이 너무 잦아 위아래 창문을 통해 바스켓에 줄을 매달아 맛있는 간식들을 서로 건네주기도 했다.
우리 아파트로 모여든 한국 사람들은 우리를 중심으로 인연을 붙여나갔다. 6층 동생, 2층 동생, 다른 아파트 유학생들까지. 우리 남편은 늦깎이 유학생이라 내가 제일 큰 언니였다. 우리 집은 C- 아파트의 사랑방이 되었다.
남편들이 학교에 간 사이, 우리 와이프들은 모여 영어공부를 했다. 공부를 핑계 삼아 거의 매주 만났다. 누가 빵 반죽기를 샀다고 하면 우리 집에서 새 반죽기 시연을 했다. 8층 그녀가 본인의 특기를 살려 슈크림 빵과 크레이프 케이크를 만들어 주었다.
서울에서 플로리다로 시집을 갔던 그녀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 시골에서 매일 빵을 구워 나누어 주면서 버텼다고 했다. 누구 하나 사정이 없는 사람이 없었다. 일기장 속에 꼭꼭 숨겨 둔 사연들을 서로 공유하며 우리는 그렇게 천천히 스며들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우리 집을 사랑방으로 내놓은 것이 또 그곳에서 살아남은 생존의 법칙이었다.
남편은 유난히 김치를 좋아한다. 아니 김치만 먹고살았던 어린 시절의 습성을 기억하는 건지도 모른다.
남편이 석사 때 교환학생으로 코넬대학교에 6개월 정도 나간 적이 있었단다. 한국 마트까지 다섯 시간을 운전해 가서 김치 한 통을 사면 한 끼에 김치 세 조각씩 아껴 먹었고 김치를 다 먹고 나면 양배추를 썰어 김치 국물에 넣어서 먹었다는 사연을 들려주었다. 그때도 넉넉하지 않은 학생이었으니 안 봐도 눈에 선했다. 남편이 짠했고 내 마음이 찡했다.
결혼한 지 5년이 넘도록 김치 한 번 담가 본 적 없던 ‘나’였다. 친정엄마와 시어머님의 김치가 수시로 배달되어 김치만큼은 늘 넉넉했었기 때문이다. 막 김치를 씻어서 먹기 시작했던 네 살 큰아이가 프리킨더 점심 급식을 먹자, 맵지만 칼칼한 우리 김치를 더 잘 먹게 되었다. 김치를 스스로 먹겠다고 할 정도였다.
역시 우리는 한국인! 김치를 먹어야 한다!
리버사이드로 1년 파견근무를 갔을 때부터다.
'김치! 원 없이 먹여 주겠다!'
다짐했었다. 당시 영어도 할 줄 모르고 운전도 할 줄 몰랐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임신을 해서 입덧이 심해도 그 약속을 지켰다.
메릴랜드에 와서도 나는 두 달에 한 번씩 김치를 담갔다. 2010년 당시 한국마트에서 배추 한 박스가 10.99-25.99달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배추 한 박스에는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배추가 여섯 포기에서 열 두 포기 정도 들어 있었다. 김치 한 통 가격은 28달러 정도였다. 긴 유리병에 4 등분된 포기김치가 네 쪽 정도 들어 있었다. 배추 한 포기가 조금 넘는 양이었다. 그러니 김치를 담가 먹을 수밖에.
한국마트에서 세일하면 배추나 무 한 박스가 4.99-1.99달러였다. 그러니 세일하는 날은 무조건 김치를 담그는 날이었다.
깍두기, 배추김치, 동치미, 열무김치, 파김치, 깻잎김치 등 모든 종류의 김치를 다 담갔다.
유학생 부부들은 대부분 갓 결혼 한 커플들이었다. 새댁들은 음식 만드는 것이 서툴고 김치를 담글 줄 몰랐다. 우리 집 사랑방에 유학생 부부들이 모이면 사람들이 그렇게 김치를 먹어댔다. 의자가 부족해 서서 밥을 먹으면서도 접시에 코를 박고 열심히 김치를 먹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김치만 있으면 김치찌개, 김치 볶음, 두부김치, 김치 찜, 김치 부침개, 김치 만두, 물냉면, 열무 비빔국수 등 많은 음식들을 만들 수 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우리 집 냉장고에는 늘 김치가 가득가득 있었다.
타국에서 한국 명절은 유난히 더 쓸쓸하다. 미국에서는 아무도 모르지만, 한국 사람만 알고 가족이 그리워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 날에 우리는 모였다. 각자 음식을 하나씩 들고 와 모이기만 하면 그냥 파티가 되었다. 호스트는 메인 요리 몇 개만 하고 게스트들은 사이드 요리를 해오거나 과일이나 간식, 음료 등을 들고 왔다. 그냥 한 상이 되었다. 빈손으로 와도 좋다.
맥주 한두 잔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정을 쌓았다. 미국에서는 회식이나 밤 문화가 거의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족단위로 모였다. 술이 목적이 아니고 서로의 사연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애정을 보태어 단단한 탑처럼 시간을 쌓아 올렸던 것 같다.
평생 잊지 못할 정말 소중한 인연들을 그때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