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그래도 웃을 수 있었다.
절망편_ chapter 2.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래도 웃을 수 있었다.
中
한참을 그렇게 웃고 떠들다가 포장마차를 나와서 걷는데 그 사람이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부축하느라 힘든 건 둘째치고
이렇게까지 이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세상에 화가 나려는 찰나,
그가 쉬고 싶다고 한다.
그래. 빨리 택시 잡아야지. 했는데,
그가 나를 잡아 데려 온 곳은 모텔 앞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앞장서 문을 열었고, 나도 따라 들어갔다.
방 안에는 조용한 침묵만 맴돌았다.
에어컨도 꺼진 방, 창문 틈으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흘러들어와, 커튼 자락 끝을 옅게 적셨다.
그는 익숙한 사람처럼 먼저 신발을 벗고, 침대 맡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나는 한 발 늦게 따라 들어가, 문이 ‘딸깍’ 소리를 내며 닫히는 걸 바라봤다.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물컵을 꺼내 물을 따르더니,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서 손끝은 가방끈을 만지작거렸고, 눈은 바닥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불이 꺼지지 않아 방 안은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 밝음 속에 잠겨 있었고,
그 안에서 나는 더 작아진 느낌이었다.
그가 다가와 내 앞에 섰다.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며 말했다.
“괜찮아. 그냥 조금 쉬었다 가면 돼.”
그가 다시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할게.”
그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원한다고 느꼈다.
그가 나를 원해준다는 게,
두려움보다 행복감이 먼저 밀려들어왔다.
어쩌면 이것까지도 사랑의 증거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처음이었고, 두려웠고, 낯설었지만
그가 내 손을 잡아주었기 때문에,
나는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나를 원해줬다는 것만으로,
내가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사람인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그래야 이 모든 게,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사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운동을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자주 언급되는 친구가 생겼다.
취업스터디에서 알게 된 사람이라고 했다.
야간 전문대에 다니며, 낮에는 중소기업에서 경리 일을 하고,
아픈 아버지를 돌보면서도 더 큰 회사로 가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여자애.
"너랑 나이가 비슷해서 그런지, 자꾸 네 생각이 나. 그래서 더 챙겨주고 싶어."
그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남을 챙길 줄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자기도 바쁠 텐데. 자기도 힘들 텐데.
예의 바르고, 성실하고, 운동도 하고, 남을 돕는 사람.
왜 이런 사람을 회사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그가 말한 회사들, 정말 눈이 멀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그는 내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세상을 탓하지 말라고, 누구도 탓하지 말라고.
포장마차에서는 내 편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같은 말에 웃지 않았다.
회사 이야기 역시, 점점 꺼내지 않게 됐다.
그가 화를 낼까 봐서가 아니라,
내가 힘들어하면 그 사람도 힘들어질까 봐.
그리고,
그가 그 여자애를 돕기 시작한 이후로는
대부분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 했다.
톡은 잘 안 읽혔고, 답장이 와도 짧았다.
조금은 서운했지만,
그 사람이 좋은 일을 하는 거니까.
내가 괜한 감정을 보이면 방해가 될지도 몰랐다.
그럴 자격도, 내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연락이 뜸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첫 회사 회식을 마치고,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그가 보고 싶어 져서, 무작정 그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집으로 돌아가라는 전화 한 통뿐이었다.
"미리 연락하고 와야지. 겨우 잠들었는데 깨버렸잖아."
화가 난 그의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짧고 어리석을까.
나는 왜, 늘 내 생각만 할까.
나는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죄를 지은 사람처럼 서 있었을까.
나 같은 애가, 감히 사랑받았다고,
가까워지고 싶었다고, 무작정 찾아간 게 문제였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