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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제이 Nov 11. 2022

어느 무더운 여름날 퇴근길

2016년 8월 18일, 어느 무더운 여름날


연일 계속되는 폭염이다. 퇴근길에 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 앞에 섰다. 횡단보도 앞에 젊은 여자와 중년의 남자가 보인다. 여자는 남자를 한 번씩 쳐다보며 열심히 이야기를 한다. 한 번씩 미소를 짓기도 한다. 남자는 말없이 여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었지만 요란한 액세서리 같은 건 없다. 남자는 베이지색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면 티셔츠를 입고 있다.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고 머리는 전혀 손질이 되어 있지 않다. 아마 일을 서둘러 마치고 나온 것 같다. 세수도 안 한 것처럼 몰골이 꾀죄죄하고 행색도 궁핍해 보인다. 오른쪽 어깨에는 어울리지 않게 푸른색 쇼울더 백을 메고 있다. 남자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시선은 아스팔트 위에 그려진 횡단보도를 바라보고 있다. 복장과 가방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여자는 소박하면서 세련돼 보였고, 남자는 투박하면서 촌스러워 보였다. 잠시 후 신호등에 신호가 바뀠다. 나는 그들의 관계가 궁금해서 뒤를 바짝 붙어서 쫓아갔다. 맞은편에 보이는 초록색 신호등 불빛이 깜빡거리며 빨간색 불빛으로 바뀔 무렵 여자가 남자의 손을 슬며시 잡으며 말했다.

"아빠, 뭐 드실래요? 여기 순댓국 잘하는 데 있는데 순댓국 먹을까?"

 

'아, 아빠였구나......'





여자의 아빠는 이 주변이 일터인 것 같다. 차림새를 보아 현장에서 먼지를 마시며 힘쓰는 일을 하는 하고 있는 것 같다. 딸은 아빠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 약속을 했는가 보다. 차림새를 보아 학생은 아닌 것 같고, 결혼한 아이 엄아 같지도 않다. 20대 중반쯤의 평범한 직장인 같다. 시아에서 멀어지는 여자와 남자를 보고 있자니 집에 있는 우리 아이들이 생각났다. 아마 현란한 손놀림으로 괴성을 지르며 게임에 몰입해 있을 것이다. 


나도 훗날 저 부녀지간처럼, 혹은 부자지간처럼 자식이 사주는 저녁을 먹어 볼 수 있을까? 번잡한 도시의 한 복판 음식점에서 젊은 딸과 노년의 아빠가 둘이 앉아서 다정하게 밥을 먹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닌 것 같다. 아마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지금과는 반대의 상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빠가 주도해서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을 것이고, 놀이공원에 갔을 것이고, 워터파크에 갔을 것이다.


법정스님의 "버리고 떠나기"라는 책에서 이런 글을 봤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 때 일뿐. 그러나 그 한 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과연 그렇게 살고 있을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지 위해 노력을 하지만 현실은 늘 부족하고 미안한 아빠다. 특히 돈이 부족해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못해줄 때 마음이 가장 힘들다. 저기 착한 딸에게 아버지 순댓국 사드리라고 돈이라도 손에 쥐어주고 싶다. 


명함이 사라진 지 3개월.

20년 전에 처음 사회에 발을 디뎌 놓았을 때 불려졌던 OOO 씨로 불려지고 있다. 외롭고 쓸쓸하지만 견딜만하다. 유독 지루하고 힘든 여름이다. 20여 년간 직장형 인간으로 쉼 없이 달려왔는데 무엇이 남았는지 허무하다. 그래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면 어려운 환경에서도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반성도 하게 되고 희망도 같게 된다. 부녀의 모습을 떠올리니 연일 35도를 육박하는 폭염 속에서도 잠시나마 기분이 좋아지고  머리가 상쾌해졌다. 오늘은 퇴근길에 딸이 좋아하는 피자와 아내가 좋아하는 복숭아라도 사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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