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를 마치고 나와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3통
모두 은서에게 온 것이다. 오늘은 등교하는 날이다. 수업 끝나고 집에 갈 시간인데 무슨 일이 있나, 통화버튼을 누르면서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왠지 불안하다.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기록되는 기능은 없으면 좋겠다. 받지 않은 전화는 공기 중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던 옛날이 좋았다.
2년 전 그날의 부재중 전화도 3 통이었다. 모두 혜미에게 온 것이었다. 만약 그 화면이 뜨지 않았더라면, 내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 기록이 남지 않았더라면, 그날 나는 혜미와 바로 통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참 후, 적어도 서너 시간쯤 후 아니면 운이 좋아 하루정도 지난 후 얘기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전혀 다른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사이 그녀의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충동은 결심을 불러온다. 충동은 결심의 도화선이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으니 활활 타오르겠지만 (그래서 부재중인 나에게 기어코 전화를 퍼부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그라든다. (인간은, 특히 한국의 애 엄마는 생각과 걱정이 많은 존재라 사그라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결심을 말로 뱉었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말은 기폭제다. 소리 없이 타다가 그 순간 쾅! 폭발한다. 결심이 선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말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 혜미의 생각은 내가 울면서 무릎을 꿇어도, 은서의 팔을 잡아끌어 그녀에게 던지듯 밀어도, 변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질타에 오히려 단단해졌다. 콘크리트 같은 굳은살이 되어 더욱 강해졌다. 딱딱해진 결심은 곧 그녀의 운명이 되었다.
결국 혜미는 떠났다. 엄마가 떠난 밤, 나는 아이와 침대에 함께 누웠다.
"이제 엄마가 없어. 진짜 가버렸네. 아빠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우리 딸도 많이 속상하지?"
"... 괜찮아, 아빠.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지. 대신 우리가 만나러 가면 돼." 은서가 나를 토닥였다.
"야, 우릴 버리고 엄마 혼자 가버렸는데 거길 왜 찾아가냐?"
"아휴. 버리긴 뭘 버려. 미국서 공부하고 싶어서 간 건데. 학교에서 장학금까지 준다잖아. 엄마가 나 겨울방학식 날에 맞춰서 비행기표도 보내준다 했는걸." 은서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한다.
"칫... 넌 아직 어려. 아빠 마음을 모른다." 나는 은서에게 등을 돌리고 몸을 웅크렸다.
은서의 가을운동회 날이었다. 나는 휴가를 내고 운동회에 갔다. 운동장에 학부모들이 가득했다. 모두 엄마가 오거나, 엄마 아빠가 오거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왔다. 아빠만 온 집은 없다. 나밖에 없다. 혜미를 원망했다. 망할 기집애, 갈 거면 운동회는 보고 가지.
은서는 이날 반 대항 100m에서 1등 하고 300m 계주에서 옆 반 승연이를 역전했다.
"내가 1학년 때부터 승연이를 얼마나 이기고 싶었다고!" 그날 집으로 달려온 은서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나는 아이가 엄마의 빈자리를 느낄 틈이 없도록 더 큰 소리로 소리쳤다.
"잘했어! 넌 역시 아빠 딸이야! 내 딸이 달리기를 못 할 리가 없지! 아빠가 동영상도 다 찍어놨어!"
치킨을 주문했다. 애들 축하 파티에는 역시 치킨 아니던가. 하지만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치킨 박스를 받아 든 은서의 표정은 신나 보이지 않았다. 맛있는 것을 보니 역시 엄마 생각이 나는가 보다. 나는 은서의 어깨를 감싸며 다정하게 말했다.
"은서야. 배고프지? 치킨 맛있겠다. 아빠가 닭다리 두 개 다 줄게. 오늘 우리 딸, 진짜 멋있었어!"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한다. "아빠... 지난주 일요일에도 엄마 환송 파티한다고 치킨 먹었잖아. 우리 치킨은 앞으로 한 달에 한 번만 먹자. 내가 아빠 생일이 있는 달은 특별히 두 번 먹어줄게. 몸에 좋지도 않고 살만 찌는데, 아빠는 엄마 없다고 맨날 치킨만 먹을 것 같아."
맥주를 마셔도 자꾸 목이 멘다.
"응, 은서야. 아빠 회의했어. 무슨 일 있어?"
나는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차분히 물었다. 은서는 지금 집에 성찬이와 같이 있다 한다. 출산휴가에 들어가는 담임선생님을 위한 선물로 반 아이들이 쓴 편지를 정리하고 선물을 포장해야 하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었단다.
"선생님 깜짝 선물인데 학교에서 할 수도 없고, 성찬이네는 형 과외한다고 엄마가 집에 못 오게 하셔서 그냥 우리 집으로 왔어. 아빠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빠가 전화 안 받더라."
통화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은서의 말을 생각했다. 선생님, 편지, 포장, 과외, 성찬이네 엄마, 성찬이, 우리 집... 빈집. 엄마 없는 집.
지금... 설마...?
맞다.
지금 엄마 없는 빈집에 은서가 성찬이와 단둘이 있다는 얘기다. 여자애와 남자애가 단둘이 아무도 없는 집에!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스쳐봤던 포털 메인 기사 헤드라인이 퍼뜩 떠올랐다.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기사를 확인했다.
'놀이터서 10대 학생들이 성관계... 경찰, 훈방 또는 입건 검토 중'
열다섯, 열여섯의 아이들이 빈 놀이터에서 사고 친 사건이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은서네 반 단톡방에서 엄마들의 대화가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대면 수업 일수가 주 2~3일로 줄어들면서 학교 수업 방안에 대한 의견을 취합하자는 톡이었다. 엄마들은 학교에 가는 날 필수 수업으로 국·영·수 파와 예체능 파로 나뉘었다. 국·영·수를 온라인으로만 수업해서는 절대 부족하다, 선생님 감독하에 단원평가 시험도 봐야 한다, 안 그러면 학습능력이 저하된다... 아니다, 아직 공부보다 운동이 더 중요한 시기다, 학교에서라도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예체능 수업을 꼭 해야 한다….
아무도 성교육에 대해 얘기는 하지 않았다. 세상은 오로지 국·영·수, 오로지 예체능뿐이다. 혜미로부터 은서가 초경을 시작할 때가 됐으니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화를 냈다. 혜미는 생리대만 사놓으라고, 나머지는 학교에서 가르쳐 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간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성교육 수업은 온라인으로도 오프라인으로도 없었다. 단톡방 엄마들에게 생리대 사용법을 물어볼 수도 없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할 수 없이 같은 팀 김 과장에게 물어봤다. 김 과장은 10년 넘게 함께 일하고 있는 후배로, 아직 유치원생이기는 하지만 딸 둘을 키우고 있는 워킹맘이다. 김 과장의 말은 더 놀라웠다.
"차장님, 엘사 모르세요 엘사?"
김 과장 말에 의하면 요즘 맘 카페에서 엘사 영상이 이슈라 한다. 유튜브에서 엘사를 검색하다 잘못 걸리면 어디 저기 듣도 보도 못한 제3 국에서 제작한 포르노 영상이 뜬다, 주인공이 엘사랑 크리스토프다, 올라프랑 스벤까지 나온다...
"어떤 집은 애들이 조용해서 뭐 하나 하고 들여다보니 그런 엘사 영상을 보고 있더래요. 어유 끔찍해."
등줄기가 서늘해질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엘사라면 나도 잘 안다. 은서 방에도 아직 엘사 인형이 있다. 우리는 은서가 여섯 살 때 함께 극장에서 <겨울왕국>을 봤고, 인형은 미국 아마존에서 직구했다.
"미친 거 아냐? 세상이 왜 이래?"
"그래서 요즘 애들이 그렇게 빠르대요. 정보를 얻는 루트가 상상 초월한대. 어쩌면 은서도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아니 6학년인데 다 알지. 생리대 사용법? 그런 거는 초등학교 수업 시간에 가르칠 것도 없대요. 피임법을 가르쳐야 한다던데요?"
김 과장의 말에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담배만 피워 물었다.
퇴근길, 마트에서 15분이 넘도록 생리대를 골랐다. 겉 포장을 보니 혜미는 <좋은 느낌>을 썼었던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유기농이라 쓰여 있는 것이 있고 안 쓰여있는 것이 있었다. 유기농도 유기농 커버와 유기농 순면 흡수체로 나뉘었다. 혜미가 출산 준비할 때 유기농 내복을 고집했던 기억이 났다. 나는 유기농 순면 흡수체로 오버나이트 대형 중형 소형 팬티라이너 각각 한 개씩 샀다. 1+1 하는 <좋은 느낌>보다 값이 두 배는 더 비쌌다. 집에 돌아와 은서에게 내밀면서 필요하게 되면 쓰고 부족하면 말하라고 했다.
"나 이거 있는데?" 은서가 말했다.
은서는 이미 두 달 전에 생리를 시작했다. 사용법은 같은 반 친구에게 물어봤고, 생리대도 친구와 함께 가서 친구 것과 같은 것으로 샀다. 왜 아빠한테 말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건 프라이버시야. 뭐하러 말해?"
"그래도. 엄마가 있었더라면 축하 파티도 하고 이것저것 잘 챙겨줬을 텐데... " 나는 또 목이 메었다. 은서는 나가라고 등을 밀면서 방문을 닫았다.
그래, 그 아이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열세 살이면 옛날에는 시집갔을 나이다. 나는 내 딸을 너무 모른다. 아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다 컸다. 다 큰 딸이 학교에서 성교육도 못 받은 채 남자 친구와 단둘이 빈집에 있다니.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반차를 냈다. 정신없이 뛰어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동안 온라인 가십으로만 여겨졌던 일들, 신문에 연일 보도되었던 미성년자 사건·사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래전 혜미가 이야기해줬던 소설도 생각났다. 중학생 딸이 임신해서 출산하기 전날에야 부모가 알게 된 내용이라며,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혜미가 물었었다. 그때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뭐 하려 하냐고 짜증을 냈었지. 그런데 나에게 현실이 될 줄이야!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어떻게 하지? 임신을 하면 낙태해야 하나? 그런 건 몸에 정말 안 좋을 텐데. 낳아서 내 호적에 올려야 하나? 그 남자애네 호적에 올려야 하나? 절대 은서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된다. 내가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데... 똑똑하고 예쁜 우리 은서는 나중에 대학도 가고 유학도 가고... 이게 다 집에 엄마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혜미 기집애가 우리 딸을 버리고 떠나버려서 이렇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혜미가 알게 되면 뭐라 할까? 애 하나 똑바로 못 키웠다고 난리 칠까? 날 못 믿겠으니 은서만 데리고 미국으로 가버릴까? 그럼 난 여기 남아 갓난쟁이를 키워야 하는 건가? 아니 먼저 그 남자애 부모부터 만나야 하는 게 아닐까? 이름이 뭐였더라? 승찬이? 성찬이?
단톡방을 뒤져 성찬이 엄마의 톡을 찾았다.
김미진(은찬, 성찬)
1:1 채팅창을 열었다. 뭐라 해야 하지?
'안녕하세요, 은서 아빤데요...' 안녕은 뭘 안녕해?
'성찬이가 지금 우리 집에 있는 거 아세요?' 이건 너무 교양 없어 보일까?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도착했습니다."
택시기사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나는 빈 채팅창을 서둘러 끄고 카드를 냈다. 손이 덜덜 떨렸다. 미친 듯이 달려 8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진동 소리보다 내 심장 박동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겨우 키패드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부엌 쪽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린다.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향하니, 나란히 앉은 아이 둘의 뒤통수가 보였다. 식탁 위는 커다란 전지와 색색깔의 포스트잇, 리본, 가위, 풀, 테이프, 드라이플라워까지... 정신없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고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히-메 히메! 히메! 스키 스키 다이스키!
히메! 히메! 키라키라링!
요즘 은서가 좋아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주제가다.
"어? 아빠 안녕? 일찍 왔네!" 뒤돌아 날 본 은서가 활짝 웃는다.
"안녕하세요?" 성찬이가 일어나 꾸벅 인사한다.
"응, 성찬이 오랜만이다. 잘 돼가니? 아빤 근처에 외근 나왔다가 바로 퇴근했어."
"응. 근데 아빠, 성찬이도 이 노래 엄청 좋아한대. 그래서 한 시간 반복 클립 찾아서 지금 우리 계속 듣고 있어. 흐흐..."
아이 둘이 마주 보고 웃는다.
아이들은 음악을 들으면서 가위질과 풀칠을 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흥얼거린다.
더도 덜도 아닌, 전화로 말한 그대로의 상황이다. 작업이 끝나면 테이블을 정리한 뒤 친구는 인사를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은서는 퇴근한 나에게 친구와 집에서 논 이야기를 했겠지.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 놈일까...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다.
"잘했어. 성찬아, 너 학원 없으면 저녁 먹고 가라. 아저씨가 치킨 시켜줄게. 아, 치킨은 좀 그런가? 그럼 우리 피자 먹을까? 얼른 엄마한테 전화로 여쭤봐." 아이들이 신났다. 나도 신난다. 휴대폰으로 패밀리 사이즈 피자를 주문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히-메 히메! 히메! 스키 스키 다이스키!
오늘 일은 혜미에게 절대 비밀로 해야겠다.
절대.
쉿.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