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버는 이를 갈지 않으면 결국 그 이가 자라 턱을 뚫고 결국 죽는다.
FACT
비버는 물을 막기 위해 스스로 댐을 설계하고 만든다.
집이 무너지지 않아도, 비버는 계속 보수한다.
일을 멈추면 이빨이 자라 스스로를 해친다.
QUESTION
그들이 짓는 건 집일까, 안심일까?
노동이 멈췄을 때, 비버는 무엇이 되지?
일하지 않으면 불안한 생명은, 과연 자유로운가?
쓸모가 없어진 존재는, 살아도 되는가
인간은 언제부터 스스로를 ‘쓸모’로 증명하게 되었을까.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할 일을 채우고, 수치를 보고하고,
무언가를 생산하지 않으면
존재의 이유를 잃는 듯한 죄책감에 휩싸이는 삶.
이 사회는 '일하지 않는 자'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쓸모 없는 자'를 시스템 밖으로 배제한다.
우리는 종종,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존재를 게으르다, 무가치하다, 비효율적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곧 "너는 살아 있을 자격이 없다"는 선언에 가깝다.
그리고 그런 사고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뿌리박고 있다.
"네가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너는 사라져도 좋은 존재다."
이 개념은 인간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동물에게
"이 동물이 인간에게 쓸모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서 생명 유지의 당위성을 판단한다.
하지만 어떤 동물은
스스로도 그렇게 믿게 되어버렸다.
비버, 존재를 갉는 동물
비버는 물을 막기 위해 댐을 짓고,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갉는다.
그리고 그 모든 행동은 그의 본능이자 생존 조건이다.
비버의 앞니는 멈추지 않고 자란다.
만약 그가 나무를 갉지 않으면, 그 이빨은 입천장을 찌르고 턱을 뚫고,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는 일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 갉히는 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진화였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노동을 멈출 수 없는 강박의 몸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도, 스스로를 갉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쓸모 없을 자유 없이, 존재의 권리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쓸모로만 살아가던 세계에,
존재 그 자체로 살아갈 수 있는 날은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