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 있는 시간에 에너지를 채우는 내향형 인간이다. 무엇을 하느냐 보다는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고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어야 에너지가 충전된다. 그래서 그런지 혼자 자취할 때는 에너지가 넘쳤었다. 퇴근 후 어두컴컴한 집에 전등불을 켜는 순간부터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듯한 상쾌함을 느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먹거나 공부를 하고 출근해서 열심히 일 한 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장을 보고 조리를 해서 저녁을 해 먹고 공부를 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잠이 들었다.
그야말로 멋진 어른의 정석인 듯한 매일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젊은 나이 탓도 아니오 건강한 70대 노인과 같은 체력 덕분도 아니었다.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보장하는 나를 위한 공간에서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든 내 생각대로 움직이면 되는 생활은 깨어있어도 피로보다는 활력을 주는 시간이 되어 주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거나 보고 싶은 영화와 드라마가 있을 때, 하고 싶은 취미 생활이 있을 때,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서 뒹굴거리고 싶을 때...
누군가가 의견 조율을 하지 않고 스케줄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에너지 소모를 줄이고 당연한 자유를 느끼게 한다. 내 생활을 온전히 내 뜻대로 하는 자유가 얼마나 많은 힘을 주는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그 자유를 충분히 누려본 사람이건 제한당해본 사람이건 모두 알고 있다.
나는 혼자의 삶에 주어지는 의무조차 자유로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혼자인 시간에 주어진 모든 의무에서조차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분명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공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느낄 수도 있다. 누군가와 할 일과 걱정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 오히려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나누는 것"에 자유가 전제될 때 이야기이다. 어떤 것을 자유로 느끼느냐는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되는 사람이라도 온전히 자신을 돌보기 위한 시간은 꼭 필요하다. 자아를 가진 인간이 자신을 보는 시간 없이 시선을 밖으로만 향하게 되면 진정한 나는 나에게로부터 고립되고 만다. 어떤 성향의 사람이건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런 시간은 나를 위한 공간에 있을 때 가능해진다. 타인과 함께여도 나를 위한 공간에서라면 차단하기가 쉽다. 혼자 있더라도 낯설고 불안한 공간에서는 자신을 바라보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는 공간이 필요하다.
혼자만의 공간 만드는 방법
본가로 돌아오면서 연로하신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 내 방이 있었지만 나만의 공간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방문을 모두 열고 생활하는 분위기 탓도 있겠지만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기만 하면 되는 자녀가 아닌 함께 가정을 운영해야 하는 성인이라서 그러했다. 굳이 나의 도움을 요청받지 않아도 스스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외부 활동이 줄어드는 부모님과 대화하는 시간도 가져야 했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기는 성향 때문에 내 방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가 어려웠다. 언제나 신경은 방문 밖으로 향해 있었다.
근무시간이 긴 회사에 입사하면서 내 상태는 악화되었다. 회사에서의 시간, 집에서의 시간, 어디에서도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고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는 회사 생각과 집안일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고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나의 일부분은 언제나 밖을 향해 있었다.
다행히 외부와 단절된 공간과 시간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울증 치료를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나만의 공간 만들기였다. 처음에는 가구를 옮겨 방 안에서 분리된 공간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가구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방 안에서도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커튼을 이용해 방문을 가리고 책상을 방문을 바라보게 배치해 인테리어 상으로는 분리에 성공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분리된 기분이 나지 않았다.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가구 이동을 모조리 해보아도 마음에 드는 공간 분리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키 높은 가구를 이용해 공간을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조명을 이용해 심리적으로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천장등을 끄고 책상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스탠드 조명을 켜니 주변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조명이 비치는 책상 위의 공간만이 남게 되었다. 나의 시선은 책상 위 밝은 부분에 집중되었고 그곳에서 공부를 하든 책을 읽든 그 공간 밖으로 시선과 생각이 벗어나지 않았다. 방 밖에서 소리가 들려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렇게 독립하지 않고도 가구 배치와 조명을 통해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는 방 불을 끄고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기만 하면 된다. 해야 할 일은 책상에 올려놓으면 바로 시작할 수 있고 집중도 잘 된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에도, 혼자 조용히 영화를 보고 싶을 때에도 책상에 앉는다.
이런 느낌은 나만 받은 것이 아닌지, 따로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그 시간에는 가족들이 말을 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기운을 채워주는 장소 만들어 놓기
집순이지만 집이 아니더라도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외부공간도 있다. 분위기 좋은 카페나 탁 트인 공원, 동네의 작은 도서관이나 종점에서 탑승해 종점에서 내린 지하철도 사람에 따라 에너지를 얻는 공간이 될 수 있다.
내가 가끔 집이 아닌 곳에서 에너지를 얻는 방법은 다양하다.
날씨가 좋을 때에는 공원에 가서 산책을 하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도서관에 가서 신간 코너에서 관심 있었던 책을 발견하는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꺼내 인상 깊었던 부분을 찾아보기도 한다. 열람심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자극을 얻기도 한다. 외출할 때 일부러 일찍 나와 멀리 돌아가는 노선을 선택 하기도 한다. 편안히 앉아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낯선 동네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가 있다.
인테리어가 예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휴식이 된다. 적당한 소음이 있는 카페는 집중도 잘 되고 키보드 소리도 의식되지 않아 글쓰기에도 좋다. 예쁜 공간에 있으면 내가 나를 대접해준다는 기분이 들어 힘이 난다.
외부 활동을 하기 좋은 봄과 가을에는 어디든 돌아다니면서 그냥 걷는 것도 좋다. 이어폰을 꽂지 않고 그저 주위를 찬찬히 둘러 보거나 생각에 잠겨서 목적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머릿속을 얼마나 개운하게 해 주는지 모른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새로운 관심거리를 발견하기도 하고 잘 풀리지 않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집에서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 어렵다면 이렇게 외부에서 찾아보는 것도 좋다. 꼭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곳이 많다. 커피 한잔 값에 두세 시간씩 멋진 공간을 소유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