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나는 우울증 치료 중이다. 우울증 인지도 모르고 그저 나이 들어서, 스트레스받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았는데, 우연히 방문한 정신의학과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하고 있다.
우울증이라고 인식할만한 특별한 증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져 아침에 있었던 일을 점심에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고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졌다. 식욕은 없는데 음식이 눈앞에 있으면 입에 집어넣었고 일단 먹기 시작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먹었다. 무엇을 해 볼 의욕도 없고 기쁘거나 슬픈 감정을 느낄 겨를이 없을 만큼 바빴다. 신체 효율이 떨어지니 일은 자꾸 밀렸고 개인 시간은 줄어들었다.
고민을 털어놓아도 다들 나이 들어서 그렇다고 했다. 자기들도 그렇다고 했다.
증상은 있었지만 우울증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산다고 했고 이 사람들이 다 우울증 일리가 없으니까...
치료 하기 이전의 기억은 온전히 남아 있지 않다. 아주 부분적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정신적인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우울증 증상에 일치하는 게 있어도, 이런 건 누구나 해당되는 거라며 무시했고, 가끔 병원에 가볼까 친구들에게 말해봤자 나 스스로 했던 말을 그들의 입을 통해 들을 뿐이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살고, 좀 쉬고 마음 편하게 먹으면 이겨낼 수 있다고 말이다.
게다가 정신과 약물 치료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심각하게 일상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이 받는 게 약물 치료라고 생각했고 나같이 자존감 강한 사람은 약한 우울증 정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 생각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진 않았지만 엄청나게 심각한 상태에 있는 소위 중증 환자라고 생각했었다.
나에게 정신과는 그렇게 심리적으로 멀었고 정말 눈에 띄게 심각한 사람을 위한 곳이었다. 직접 병원을 찾아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렇게나 쉽게 좋아지다니
가까운 곳에 갈만한 병원이 있나 찾아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정신의학과가 있음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지나다니던 길, 그저 병원이 좀 많은 편이라고만 생각했지 서로 인접해 있을 만큼 정신의학과가 많은 줄은 몰랐다. 정신의학과는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과는 다르게 눈에 띄는 곳에 여러 곳이 있었고 환자들도 많아 예약이 필수였다.
그리고 비용도 저렴했다. 의료보험적용이 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왠지 내과나 이비인후과 같은 일상적인 병원보다 몇 배 비쌀 거라 생각했었다. 초진비는 검사를 포함해서 5만 원 남짓이었고 매번 들어가는 비용은 진료비와 약값을 더해 1만 원 남짓이었다.
제일 놀라웠던 건 약효였다.
약이 나에게 잘 맞았던 것인지 경증이어서인지 몰라도 복용 다음날 바로 효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세상의 소음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하루의 피로감도 줄어들었다. 복용 기간이 길어지면서 감정 조절도 쉬워지고 일상적인 긴장감이 많이 줄어들었다. 삶에 대한 의욕이 생기고 나 자신을 바라 볼 용기도 생겼다.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도 외부를 향한 예민함이 줄어들고서야 생긴 여유였다.
타인에게 신경 끄기, 나에게 집중하기, 좋아하는 것 찾기, 기분 전환하기, 평온한 기분 유지하기 등 그동안 해내려고 애써도 안 됐던 활동들을편안하게 해 낼 수 있었다. 그동안 남들에게 자주 지적당했던 "그 정도로 화낼 일이 아닌 것에 그 정도로 화내지 않는 것"과 "신경 쓸 일이 아닌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노력하지 않고도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되는 일들이 되었다.
애초에 짜증이 나지 않았고 들으려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았다. 외부와 나를 차단시킬 수 있게 되었고, 감정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고 스스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던 나에게 매번 실망했었는데 이런 나와 저런 내가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동안 열심히 봤던 성격과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참고하지 않아도, 내가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마음먹은 대로 그럴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세상이 어떻든 내 마음이 평온하면 된다라는 말을 이제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었다.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정해진 시간에 처방된 약을 꾸준히 먹은 게 전부였다.
너무나 간단하게 매일을 살아가는 게 쉬워졌다.
열이 날 때 해열제를 먹으면 열이 내려가고 콧물이 흐를 때 콧물약을 먹으면 콧물이 멈추는 것처럼 우울증 약을 먹고 우울증으로 인한 증상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내면의 문제들이 사실 우울증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게 단순히 약 몇 알 삼키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제일 놀라웠다. 코가 헐도록 코를 풀어대면서 콧물약을 먹지 않으면 미련하다 생각하면서 왜 정신적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온몸이 헐어대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싶다. 이렇게 쉬운 길을 두고 알려고조차 하지 않으면서 얼마나 나를 괴로운 상태로 두고 채찍질하며 멀리 돌아왔는지 모른다.
또 하나 도움받을 곳이 생기다
정신과에 대한 거부감은 상담에 대한 부분도 컸는데,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 잔소리를 듣고 고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 너무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미 내 성격에 문제가 많다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의사에게까지 완치를 목표로 나 자신을 바꿀 것을 요구당하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았다.
실제 상담을 받아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상담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대부분이고 인지 왜곡이 있는 부분만 적절하게 짚어주는 정도였다. 좋아지기 위해 내가 노력한 것은 제 때 약을 챙겨 먹는 것뿐이었고 증상이 변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의 태도와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몸이 아프고 약한 것에 약을 힘을 빌렸듯 예민하고 불안정한 정신도 약의 힘을 빌리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쉽게 생각하고 받아들였으면 될 일이었다. 쉽게 해결할 수 있다면 쉽게 하면 된다. 해보고 아니란 생각이 들면 그만두면 그뿐인 것이다. 정신과 약도 결국 내가 더 나은 삶을 위해 쓸 수 있는 수많은 방법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 동안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어 외부의 일들이 너무 자극적으로 인식되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도 크게 확대시키며 나와 남 모두 괴로운 상황으로 몰아갔었다. 지나간 일을 반복적으로 되뇌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로 힘들어하고 왜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은 그렇게 쉽게 잊어버린 것인지 화를 냈다. 비슷한 일이 생기면 과거 일에 더해서 몇 배로 화가 났고, 겉으로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치솟는 짜증스러움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억눌러야 했다.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 좋아하는 활동을 하며 기분을 전환하는 것, 짜증 낼 일이 아닌 것에 짜증을 내지 않는 것, 기분 나빴던 일을 되뇌지 않는 것 등 일상이 편해지기 위해 해야 하는 모든 것들이 전부 약을 먹고서야 가능해졌다.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치료였다.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과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무겁게 누르지 않는다. 오히려 기댈 곳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하다. 몸이 힘들면 한의원에 가고 운동을 하고 약을 먹으면 됐다. 몸상태를 살피며 필요한 조치를 하면 되니 건강에 대해 남들보다 오히려 신경을 덜 쓰는 편이고 가볍게 생각한다. 아프면 의사한테 가면 되지라고.... 이제 정신적인 문제도 마찬가지다. 아프면 의사한테 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