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렉센터와 도서관
검사 기관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며 하루하루 지내고 있었다.
한국이었다면 그동안의 시간이 지옥 같았겠지만 여기는 조금 달랐다.
아이가 친구들과 트러블이 생기면 오피스로 불려 가서 교장의 지도하에 반성하는 시간도 갖고
(여기는 온갖 궂은일은 교장이 다 한다는... 어느 반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교장한테 전달해서 해결한다.)
점심시간에 나가 놀지 못하는 벌도 받고 싸운 친구와 오해도 풀고 화해도 하는 시간을 갖는데,
다행히 한국과 달리 엄마를 불러 다그치고 사과를 받아내고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내 전화번호가 그 친구 엄마에게 전해져 항의의 전화가 오고
나는 무조건 죄송합니다 해야 하는 그런 류의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단 한 번밖에 전화를 받은 적이 없는데 그녀는 한국 엄마였다.
물론 학교에서 내 번호를 전해준 일은 없었다.
학교에 한국 아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몇몇 있었고 나는 주로 숨어 다니는 편이었는데
카카오톡 단체톡에 예전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한 것이 아니라 쓰지 않으려다가 나도 여기서 분명히 느낀 바가 있기 때문에 한번 적어보자면,
여기는 부모와 아이를 각각 다른 인격체로 취급하기 때문에
아이의 잘못에 대한 부모의 사과를 요구하거나 부모 탓을 하지 않는다고 들은 적이 있다.
결국 부모는 제대로 교육시켰는데 아이가 말을 안들을 뿐이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가정에서 나와 학교에서 생긴 일들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교육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아이들끼리 싸운 문제는 무조건 이 두 아이에 대한 처벌이나 화해 등 이 둘 사이에서 해결하도록 도와준다.
간혹 교장이 전화나 이메일로 오늘 있었던 사건들을 통보해 주기도 하는데,
그것도 단지 아이에 대한 행동을 알려주는 데 있지 부모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처럼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니 가정교육 좀 잘 시켜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의 국공립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그리고 학교까지도 아이가 사고를 쳤다 하면
연락이 오거나 불러들여서 너희 아이가 이런 잘못을 하였는데 상대방 부모가 많이 화가 난 상태이니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발 집에서 좀 더 신경 써서 교육시켜 달라고 한다.
그러면 무조건 낮은 자세로 사과를 하고 집에서 엄하게 훈육하고 더 신경 써서 잘 지도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모범 답안일 것이다.
나도 처음엔 여기 와서도 전화나 메일로 그런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배운 게 그런 것뿐이니까...
하지만 여기선 그런 걸 원하는 것 같진 같았다.
교장이 말하길 나는 그저 오늘 일을 너에게 알려줄 뿐이고 우리끼리 그 일을 이렇게 저렇게 잘 해결하였으니 너희 아이와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
아이는 이런저런 작고 큰 일을 겪어가며 학교 생활에 1년, 2년 적응 기간을 길게 가지며 지내왔다.
다행히 검사를 권유하신 좋은 선생님이 4, 5학년 2년 동안 담임 선생님이 되셔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교 후 놀이터에서 노는 것도 한계가 있었기에 여러 액티비티를 찾아내야 했다.
여기는 각 시마다 "렉센터"라고 불리는 Recreation Centre 또는 Community Centre가 있는데
한국의 주민센터처럼 저렴한 가격에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운동이나 다른 취미 활동을 수강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운동을 잘하고 좋아하는 아이들이 하키나 축구, 야구, 수영 등 각 클럽에 가입하여
힘들게 가르치고 연습하고 나아가 다른 클럽과 경기도 하는 곳이 있긴 하지만
운동 신경이 그리 발달하지 않고 그마저도 운동을 싫어하는 우리 아이에게 적용되는 곳은 아니었고
우리는 렉센터로도 매우 만족했다.
뭐 운동을 배운다기보다는 놀자판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게 어디냐.
힘들면 더 안 가려고 할 거라 놀자판이면 대환영이고 그냥 가서 신나게 뛰다가 오기만 해도 되었다.
아이가 싫어하는 운동을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데리고 다니는 것은 정말 곤욕이었다.
고집세고 자기주장 강한 아이를 협박하고 달래며 다닌 것은 농구, 축구, 배드민턴, 테니스, 스케이트 등등...
이 정도를 약 4년 정도 해 온 것 같고 그중 농구와 배드민턴이 지금까지 6년 넘게 지속해 온 것이다.
아이의 나이가 많아질수록 이런 스포츠 레슨들이 줄어들어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운동 신경 없는 아이도 이 정도 꾸준히 해오니 막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곧잘 하게 되었다.
사실 adhd 아이들에게 좋다는 승마나 캐나다에서 주로 하는 하키 같은 운동들도 한동안 해왔었다.
그런데 남들에게 좋다고 해서 우리 아이에게도 좋은 것은 절대 아니다.
뭔가를 하러 가기 전에 매번 옷도 갖춰 입고 낯설어서 긴장감이 드는 운동은
우리 아이에게는 별로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편하게 가서 편하게 즐기다 올 수 있는 것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
아이는 다행히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혼자 책을 읽어왔는데 여기 와서도 금세 영어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만화책부터 시작하긴 했다.
여기 어린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Dogman"부터...
이 책의 작가는 어릴 때 adhd 진단을 받고 그 상상력과 엉뚱함을 발휘해 계속 만화를 써오고
성인이 되어서는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인물이다.
"Dogman"시리즈만 해도 10권이 넘고 "Captain Underpants" 등 또 다른 시리즈들도 엄청 많다.
("80HD"라는 우주선인가 괴물인가를 보고 정말 대폭소. "80HD"를 영어로 발음해 보면 알 것이다.)
아이는 이 책을 순수하게 좋아했고
나는 아이가 이 작가처럼 성공 케이스가 되길 속물처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아이는 만화를 그리겠다며 몇 년에 걸쳐 방대한 양의 연습장에 습작을 남기신 바 있다.
언제까지 보관 가능할지... 아이가 커서 이를 보기를 원할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렉센터와 도서관은 붙어있어서 렉센터 운동 전 후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반납한다.
학년별 추천도서를 모조리 섭렵하고 도서관에 구비된 어린이 책들은 거의 다 읽었을 것이다.
나는 책을 읽은 아이에게 요약이나 느낌 정리 그 어느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냥 재미있게 읽고 재미없으면 덮어버리고 다른 것 골라 읽고...
여기 책은 판타지나 어드벤처, 미스터리 같은 류의 책들이 많은 편이다.
어린이 책이라 그런가 아님 상상력들이 풍부해서 그런가...
게다가 아이는 한국에서 신비아파트부터 시작하더니 여기서도 공포 소설에 빠져 한동안 그것만 읽기도 했다.
나는 단지 그런 책들 사이에 가슴 따뜻한 감동적인 책들을 찾아 슬며시 끼워 넣는 일만 줄곧 해왔다.
제발 이 습관이 길게 가야 할터인데...
중학생인 요즘은 그놈의 게임 때문에 독서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긴 하나,
그래도 여긴 숙제가 있거나 공부를 하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아직도 심심할 땐 책을 읽는 것 밖에 없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