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처럼 그 시간을 견디다
안녕, 다들 잘 살아있는지. 나는 겨울을 견디는 생명력에 집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겨울의 나무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생명력을 자랑하는 초록도, 잎도, 꽃도 다 털어낸 채 앙상한 잔가지로만 남는다. 나의 겨울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나는 겉으로 멀쩡해 보이지 않아도 살아야만 했던 시간을 지나왔다. 누구나 겨울은 있다. 덜 춥고, 더 춥고 이런 발 족쇄 자랑은 하지 않으려 한다. 조현병이라는 병명을 짊어지고, 말 못할 상처들, 관계의 외로움 그 모든 무너진 채로 살아야 했던 시간은 바로 나목의 계절이었다. 살아야만 했다. 벗겨져도, 버려져도, 나는 여전히 살아있는 나목을 보고 살았다.
어린 왕자의 작가가 말 못 하는 나무를 친구로 두었다는 말은 나를 호기심에 들게 했다. 나는 그 당시 왕따를 당해서 인간 친구가 없었다. 나무 친구를 만들었다는 아이디어는 좋게 들렸다. 나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곧바로 공원의 나무의 앞에 가서 나는 그 나무에게 친구 선언을 했다. 나무는 친구비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 나무는 나의 친구가 되었다. 여름에는 초록색 그늘을 선사해 주고, 가을에는 겨울에 웅크릴 준비를 했다. 나는 여름 나무는 활기차서 좋았고, 겨울의 나무는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겨울에는 더 이상 무성한 잎도 없고, 꽃도 없지만 속에서는 아주 조용히 미세하게 물을 올리고 있다. 나는 사주에 수기운이 없어 그런 기운을 미세하게 느꼈던 것일까? 살아있음, 물의 순환이 느껴졌다. 나는 생명의 냄새를 먼저 맡는 사람이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앙상했던 가지 끝에서는 연두빛 새싹이 올라온다. 생명이 드러나는 순간, 보란 듯이 살아 있었다는 증명을 보고 말 없이 감동했다. 나는 말 못 할 고민을 인간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친구 나무에게 털어놓았다. 또래 아이들이 나를 따돌리며 가난하다 놀릴 때, 더럽다라고 하며 상처를 줄 때, 나는 나무에 기대거나 끌어안으며, 나무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으며 같이 나목이 되었다.
나는 말 못 할 비밀들이 많은 아이였다. 아동 성폭행을 당한 아이였으며, 관계에서 배제 당하는 아이였다. 그 때마다 나무를 찾아 그 안의 물을 찾았다. 나무는 그늘을 주고, 기댈곳을 주고, 자신의 물을 더워하는 매미에게 주는 존재였다. 나는 나무의 안녕을 빌며, 태풍이 와도 꺾이지 않기를 빌었다. 작은 마음이 닿아 나무는 오래오래 살았고, 나는 아직도 살아있는 나무를 본다.
나는 아픈 세월을 나목으로 견뎠다. 여기서의 아픔은 무엇일까. 아동 성폭력의 침범, 관계에서의 배제, 이해받지 못하는 슬픔, 남겨지는 감정, 외면당하는 자존감.
그것은 단순히 힘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흔들렸던 세월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울부짖는 대신 견디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마치 말라붙은 듯 보여도 속으로 살아있는 나무처럼. 벗겨지고도 죽지 않은 삶. 나목. 속에서 꿈틀대는 물로 버틴, 생명력 하나로 버틴 계절. 나는 아픈 계절을 나목처럼 살아왔다. 누가 들으면 슬픈 문장 같지만, 존엄을 지킨 문장이다. 살아있었다는 증거이고, 무너지지 않았다는 선언이고, 여전히 나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봄이 와도 얼었던 가지 끝에 새순을 틔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침묵과 추위가 있었는지 나와 그 나무 친구는 알고 있다. 그래도 살아왔어. 나는 오래오래 살거야. 나는 나무 친구와 몸으로 부둥켜 안고 체온을 나눴다. 나무는 내 체온을 느껴 겨울을 지났고, 기댈 곳 없던 나는 나무의 생명력을 매미처럼 빨아 생존했다.
나의 봄은 금방 오지 않고 서서히 왔다. 나는 전학을 갔지만, 왕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물거품처럼 되었다. 다시 왕따를 당하진 않았지만, 은근한 시선 속에서 나는 은따가 되어버렸다. 봄이 왔다고 생각하는 졸업식을 했지만, 나는 참석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에 불참하게 된다. 겉으로는 완성된 새 출발처럼 보이지만, 봄의 시작처럼 보이지만 나에게는 아직 겨울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졸업식을 참석하지 않았다. 졸업식조차 봄이 오기엔 너무 이른 시기였다. 내가 새순을 틔우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였다.
생명력에 집착한다는 것, 나목을 보며 감동을 느꼈던 것, 무기력하던 과거와 영영 이별한다는 것, 하지만 그 과거가 깊게 박힌 겨울이던 것과 꽃샘추위였을지도 모르는 졸업식을 가지 않은 것, 나무 친구와 인연을 만든 것. 나는 한때, 무기력이 나를 집어삼킨 기억이 있다. 모든 것이 살아있음에도, 죽어있는 느낌이었던 시간들이었다. 이 모든 시련과 그에 대한 기억들이 나를 무가치하게 할 수 없었다. 나를 특이하고 괴짜같이 만들어 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 기억과는 무관하게 빛났다.
이 모든 일에도, 이 모든 난리에도 나는 빛나고 있다. 나는 지금은 저런 과거로 모자랐는지 병을 앓고 있다. 조현병이다. 하지만 나를 죽일 수 없다. 나는 죽은 존재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다. 글을 쓰는 것은 생명력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나 자신이 생명력있는 존재로 남고 싶다는 갈망에서 글을 썼다. 나의 글은 힘이 세다.
나는 생명력있는 것에 대해 집착한다. 나는 너무 오래 죽어있는 것 같아서, 이제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 반응하고 집착하게 되었다. 병과 상처는 광기가 되어있다. 상처는 나를 반짝이게하는 태양이 된다. 나는 달과 별이 되어 반짝인다. 치유를 향한 본능이자 생존 의지를 보았는가? 당신도 그런 존재이다. 생명력이 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생명력이 있다.
당신 안의 생명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세상이 무심하게 돌아가도, 폭력적인 무언가가 당신을 치고 가도 당신은 나목이 되어 살아간다. 모든 것을 잃은 듯한 날에도 차디찬 계절을 지나보낸다. 그리고 언젠가는, 너의 가지 끝에서 새순이 올라올 것이다. 우연이 아니라, 너의 생명력이고, 너가 버텨낸 모든 겨울의 결실이다.
당신은 살아있는 존재다. 지금 이 순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