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애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서부터 아파트나 자산, 소유에 대한 관념을 갖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운 과정이겠지만, 나는 순간 당황했다. 아이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과 아이가 너무 물질적이 것에 물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겹쳐서 머리를 스쳤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는 방향을 택했다.
“우리 집은 우리 게 아니야, 전세로 살고 있어. 몇 년 빌려서 쓰는 거야.”
“아, 그래?.. 왜 우리 집이 아니야?”
자기 집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얼굴에 슬픈 듯한 표정도 읽혔다. 아이에게는 전세나 월세에 대한 개념이 아직은 없었다. 집을 소유하든 전세로 살든 사실 주눅 들 일은 아닌데, 순간 아이 보기 미안했다. 집 없는 아빠.
아이는 종종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와서는 누구 집은 엄청 좋고, 누구 집은 넓고 깨끗하고, 누구 집은 어느 아파트고, 누구는 어디 살고, 시시콜콜하게 얘기한다. 비교를 의식하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학교생활을 하면서 친구를 만나고 놀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의식이다. 그 말속에는 집이 아파트인지 아닌지, 자가인지 아닌지, 좋은 집인지, 비싼 집인지, 위치가 어딘지, 부러움과 아쉬움이 스며들어 있다.
자가는 아니고 전세이지만 빌라는 아니고 오래됐지만 아파트에 사니까, 중간 정도는 되는 걸까. 아이의 지나가는 말에, 나도 스스로 상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을 줄지어 놓고 나를어디쯤엔가 위치시키고 있었다. 벌써 서로와 서로를, 나와 타인의 상황을 비교하고 있었다. 그 비교 속에서, 어느 정도의 위안과 어느 정도의 열등감을 비슷한 비율로 느꼈다.
집이 뭐길래. 부러워할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없는 게 이치에 맞지만, 그래도 아직 집이 없다는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
아이들의 말은 사회를 드러낸다.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사회가 만든 생각을 아이들은 받아들일 뿐이다. 이 아파트는 얼마고, 저 아파트는 언제 지어졌고, 이곳은 얼마에 팔렸고, 오늘은 또 얼마가 올랐고. 집에 대한, 아파트에 대한 어른들의 말이 넘친다. 가진 자산의 대부분이 아파트이기 때문에 민감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아이들 생각까지 너무 현실적으로 되는 건 낭만이 없어지는 일인 것만 같다.
아파트 놀이터, 신식이다. 아이들이 놀기 좋아한다.
아이들에게 아파트는 놀이터다. 동네 주택가에는 놀이터가 거의 없는데, 아파트에는 놀이터가 꼭 한 개씩은 있다. 두 개, 세 개인 곳도 많다.
“아빠, 신성 갔다 올게. 신동아 갔다 올게. 현대2차 갔다 올게”
아이는 어디 어디 놀이터라고 말하지 않는다. 놀이터에 갈 때면, 단지 이름을 댄다. 놀이터는 아이들에게 세계다. 더 어릴 때부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놀이터에서 떠들고 뛰고 미끄럼 타고 그네 타고 줄넘기하고 축구하고 술래잡기하고 논다. 엄마아빠와 놀다가, 더 크면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놀면 해 지는 것도 깜빡한다.
아파트 놀이터는 놀기 너무 좋다. 아이를 데리고 시간 보내기도 딱이다. 신식 아파트에는 신식 놀이터가 들어서 있다. 놀이기구도 신식이다. 우리 어릴 적 타고 놀던 그런 놀이기구와는 차원이 다르다. 에디슨, 아인슈타인이 만든 거 같다. 아파트 놀이터에는 과속 자동차도 안 다녀서, 아이들에게는 더 좋다. 그렇게 아파트에는 부러운 놀이터가 많다. 도시 아이에게 아파트는 놀이터다. 좋은 놀이터가 있는 좋은 아파트.
그 아파트에 안 살면, 그 놀이터에 가서 놀기 눈치 보인다. 누구도 눈치 주는 사람은 없지만, 눈치 보인다. 아파트 주민이 아닌데도, 자주 아이와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았다. 아이가 큰 소리 칠 때면 "아이야, 큰소리치면 여기 시끄러우니 조용히 해야 해"라고 타일렀다. 아이가 사각 아파트로 둘러싸인 놀이터에서 놀 때, 나는 눈치 보는 중이었다.
좋은 환경을 가진 좋은 아파트는 볼 때마다 부럽다. 조용한 주거환경, 가까운 학교와 학원, 편리한 공간 배치, 깨끗하고 깔끔한 지하 주차장, 멀지 않은 지하철역, 그늘 많은 나무와 공원,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쓰레기장, 재밌는 놀이터까지.
그래서 인기가 많나 보다.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니, 값도 많이 오르나 보다. 그래서 아파트, 아파트 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