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투아웃 2
차례.
프롤로그.
서울의 외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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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아웃
제주의 그라운드
- 1루
- 2루
- 3루
다시, 웃기는 외야석
에필로그, 홈.
비행기 꼰대실장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거 혹시 내 얘기? 우 실장은 떨리는 손으로 ‘꼰대실장’을 클릭했다. 어느새 기사가 쏟아져있었다. 가장 위에 있는 기사를 눌러봤다.
기사는 스트레이트 형식으로 비행기에서 있었던 일을 적고 있었다. 승무원이 땅콩을 가지고 왔는데 유명 엔터테인먼트 소속 에이전트 A 씨(그렇다. 우 실장이다.)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더니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다. 마침 그 장면을 같이 일하던 동료 승무원이 찍었고, 그 동영상을 SNS에 올린 것이 시작이었다, 라고 적혀있었다.
순간 우 실장의 머리에 당시 광경이 떠올랐다. 그걸 찍었다고? 그리고 동영상도 올렸다고? 그걸?
머리가 하얗게 질렸다. 갑자기 발밑 아래 낭떠러지로 쭉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일로 설마. 내가 어떻게 되진 않겠지.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도 대표였다. 아까와는 달리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 침착함이 우 실장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자네 일이 생각보다 심각해. 회사에서 바로 대책 회의를 가질 예정이야. 자네도 바로 들어와야겠어.”
우 실장은 힘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대표실 앞에서 잠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오늘은 조금 어두운 색의 넥타이를 선택했다. 차분하게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표님, 접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도 대표는 회의실 탁자에 앉아서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 대표 옆에 회사 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마 팀장과 홍보 업무를 맡는 이 팀장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두들 굳은 표정이었다.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가뜩이나 우울했던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제발 경고 정도로 끝내줬으면. 그럼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텐데. 도 대표의 얼굴을 흘끔 쳐다봤다. 설마 형님과 동생 인연을 이렇게 끊진 않겠지.
도 대표와 벌써 이십여 년 가까이 이어진 인연이다. 우 실장이 야구단에서 쫓겨난 후 간신히 들어간 보험회사 영업 자리, 그곳에서 도 대표를 처음 만났다. 당시 도 대표는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온 엘리트로 영업 사원들을 관리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보험 영업은 우 실장의 적성에 잘 맞았다. 보험 용어가 좀 헷갈리긴 했지만 곧 적응했다. 수많은 고객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협상력을 키웠다. 그때 도 대표와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럴수록 도 대표와는 철저하게 선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도 대표가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해도 항상 공손하게 예의를 갖췄다. 그런 면이 도 대표에게 신뢰를 줬다고 생각했다. 도 대표는 계산에 철저한 아메리칸이었다.
하지만 지금 도 대표는 항상 따뜻하던 형님의 얼굴이 아니었다. 도 대표와 눈을 마주치고 싶었지만 도 대표가 눈길을 피했다.
그때 마 팀장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상황이 엄숙한 바, 우형진 실장을 직위 해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직위 해제? 그게 뭐지?
도 대표와 눈이 마주쳤다. 도 대표에게서 잠깐 안타까운 기색이 비쳤으나 곧 다시 차가운 얼굴로 돌아갔다. 머리가 안 돌아갔다. 더듬거리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그럼 짤, 짤렸다고요? 고작 이 정도 일로?”
“실장님, 고작 이 정도 일이라니요? 회사의 명예가 실추됐습니다.”
마 팀장이 앞에 놓인 종이를 흔들며 호통 쳤다. 기가 막혔다. 설마 했지만 진짜 일어나 버렸다. 해고 통지를 받은 것이다. 도 대표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도 대표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배신감이 들었다. 그동안 회사에 얼마나 충성했는데.
“대표님. 제발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이제 중요한 계약도 있잖아요. 다신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제가 약속드릴게요.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그동안의 정을 봐서라도… 대표님, 아니 형님!”
하지만 도 대표는 어두운 표정으로 우 실장의 시선을 외면했다. 대신 홍보를 담당하는 이 팀장이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우 실장님, 곧 회사 명의로 보도 자료가 릴리스 될 겁니다. 조직을 생각해서 결정해 주세요. 평소 실장님이 그렇게 강조하시던 ‘조직’ 아닙니까?”
‘조직’이란 말을 하면서 이 팀장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평소 우 실장이 즐겨 쓰던 단어였다. 특히 건배사에선 언제나 조직을 먼저 내세웠다.
우 실장에게 통보를 마치고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 팀장이 대표실 문을 열고 우 실장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도 대표가 다가와 우 실장의 어깨를 툭 쳤다.
“나중에 소주라도 한잔하자고.”
도 대표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지만 도 대표는 우 실장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대표님, 정말… 저한테 이러시면…”
우 실장은 뭐라고 더 항변을 하려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힘없이 대표실에서 걸어 나갔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는 현실감이 엄습했다. 그렇다면 내 발로 나가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 끌려 나가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터덜터덜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복도가 유난히 좁아 보였다. 벽에 걸린 황소 그림이 눈에 띄었다. 저런 그림이 있었나. 새삼스러웠다. 당당한 걸음으로 활보하던 곳이다. 스포츠 비즈니스의 최전선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다.
젊은 날 전부를 조직을 위해 헌신했다. 가족도 버렸다. 건강도 버렸다. 저녁도 버렸다. 모든 걸 쏟아냈다. 그리고 지금 버림을 받았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우는 법도 잊어버렸다.
그동안 우 실장도 팀원들을 여럿 정리 해고했다. 경기 사이클은 항상 높았다가 낮아졌다. 불경기가 찾아오면 성과가 낮은 직원을 쫓아내야 했다. 대부분 억울해했고 일부는 받아들였다. 자신의 해직이 우 실장 때문이라는 듯 대드는 이들도 있었다.
조직을 위해서다. 우 실장은 그렇게 말해줬다.
하지만 난 다르다. 우 실장은 생각했다. 난 유능하고 조직을 위해 모든 걸 다 바친 이다. 그저 그런 패배자와는 다르다. 조직이 나에게 이러면 안 된다.
실장실로 돌아왔다. 사무실 직원들은 자리를 많이 비웠다. 앉아 있는 직원들도 우 실장이 안 보인다는 듯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었다. 평소 우 실장이 지나가면 일어나서 인사를 하던 이들이다.
자리에 오니 누군가 기가 막힌 솜씨로 회사 비품을 싹 빼고 개인 짐만 싸놓았다. 평소 딸랑이던 김 부장과 정 주임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허여멀건한 신입사원 두 명이 도와주겠다는 듯 쭈뼛거리며 서있었다.
우 실장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고 자신의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액자 하나만 그 안에 넣었다. 얼마 전 대형 계약을 맺었을 때 찍은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였다. 김 부장이 축하한다면서 만들어줬던.
그곳에서 서둘러서 나왔다. 있으면 안 될 곳에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 실장 인생의 투아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