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할 만하네요?
어린 시절엔 뛰는 게 너무 싫었다. 아니, 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 싫었다.
흥미도 없고, 운동신경 또한 딱히 없어서 체육시간은 늘 공포의 시간이었고, 항상 선생님이 잘 안 보이는 구석에 숨기 바빴다.
그랬던 내가 지금 느닷없이 새벽 어스름을 뚫고 나가 뜀박질을 하고 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요즘은 그렇게 싫어하던 달리기에 빠져 재밌어지고 있는 중이다. 계획에도 없던 인생에 느닷없이 생겨버린 '달리기'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왜 갑자기 뛰게 됐을까?
시작은 6년 전 갑자기 참가하게 된 10km 레이스였다.
그 당시 같이 일하던 동료가 먼저 제안을 했는데 그 친구는 뭣도 모르고 그냥 재미있어 보인다며 나를 설득했다. 당연히 큰 고민 없이 승낙했고 대회 신청까지 열심히 연습하자는 다짐도 했다. 하지만 다짐은 마음속으로만 하고 대회가 코앞에 올 때까지 둘 다 아무런 준비를 안 하고 있었다.
대회날은 생각보다 금방 다가왔고 무슨 깡인지 결국 제대로 된 연습도 없이 나가게 됐다. 10km쯤이야 누구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완주가 목표였기 때문에 잘할 마음도 없었다. 아침 일찍 시작되는 레이스라 피곤했지만 처음 가보는 장소에서 많은 인파들을 보니 이것 또한 새롭고 재밌는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출발선을 박차고 나간 몇 분 후 사라졌지만 말이다.
시작하고 얼마간은 동료와 파이팅 넘치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웃으면서 나아갔다.
하지만 곧 1km도 못 뛰어서 벌써 한계가 찾아오고 밝았던 얼굴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집에 가고 싶다'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다'
'시간은 왜 흐르질 않는가'
이 생각만 도돌이표처럼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람들이 자꾸만 내 앞으로 치고 나간다. 내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걷기 시작했다. 점점 떠오르는 여름 햇빛에 얼굴은 뜨거워지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완주만 하자'
동료와 출발하면서 했던 얘기다. 그래 뭐 걷던 뛰던 기어가든 못 가겠나 싶었다.
그래도 나름 뛰는 대회인데 뛰는 것보다 걷는 비중이 많아지는 건 아닌 거 같아서 정말 정말 천천히라도 뛰기 시작했다. 내가 책에서 본 어떤 거북이도 느릿느릿 결국은 결승전까지 갔다. 그래, 천천히라도 뛰는 게 걷는 것보다는 빠르지 싶었다. 이미 반대편에서는 반환점을 돌고 가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 이런, 아직 나는 절반도 못 왔다는 사실에 또 절망한다.
계속 이런 식으로 뛰고 걷고 또 뛰고, 포기할까 말까만 생각했다. 다른 잡생각은 안 나고 딱 저 두 가지 생각뿐이었다. 옆에서 같이 뛰던 동료도 이제 말이 없어졌다. 꽤나 수다스러운 친구였는데 말이다. 그 친구와 나는 이제 서로 말을 할 힘도 없어서 조용히 땅만 보며 걷기만 하는 선택을 했다. 그 지친 와중에도 서로 조금이라도 빨리 뛰어가려고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경쟁하는 게 웃기다. 원래 꼴찌들이 더 치열한 법이다.
그 길고 긴 억겁이 지나고(그래봤자 1시간이 좀 넘는 시간이다) 우리는 완주라는 기쁨을 얻었고 생애 첫 레이스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가질 수 있었다. 어쨌든 완주를 하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완주 메달'이 그렇게 빛나보일 수 없었다. 인생에서 메달 자체를 처음 가져본 거라 적잖은 자존감이 생겼다. 아마도 올림픽에서 메달을 가졌을 때의 느낌을 10,000분의 1 정도 간접적으로 느껴봤다고 해야 하나.
최종 성적은 1시간 26분 44초.
목표가 완주 자체였기에 나에게는 꽤나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초계국수
레이스가 끝나고 잠시 쉬었더니 같이 긴장이 풀린 배에서 밥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아침에 긴장한 탓에 아무것도 못 먹고 공복으로 1시간 넘게 뛰었더니 몸에서 에너지를 빨리 넣으라고 난리다. 날씨도 덥고, 시뻘겋게 달궈진 얼굴 때문에 시원한 음식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서 마침 찾아낸 그 음식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바로 초계국수.
평소 주변에 초계국수 파는 집이 많지도 않고 즐겨 먹지도 않았었지만 당장 시원한 음식이 급했던 우리는 일단 가장 가까운 가게를 찾아냈다. 초계국수 두 그릇과 타들어가는 목을 진정시킬 맥주도 한 병 시켰다. 뛰면서는 물 한 모금도 체할까 봐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술만 적셨는데 가게 냉장고에서 갓 태어난 맥주맛은 그야말로 내 모든 혈관이 전기에 감전된 것 마냥 짜릿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살얼음이 가득한 초계국수 한입은 내 뇌까지 얼어버리게 할 정도였다. 이제야 빨개졌던 얼굴의 혈색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땀으로 축축했던 옷이 말라가는 것 같았다. 그 집이 맛집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살면서 먹어본 가장 맛있는 초계국수는 확실했다. 역시 운동 후 먹는 밥이 꿀맛이었던가. 이 맛을 잊지 못해서 인지 요즘도 레이스 후에 계속 냉면이나 메밀국수 같은 것만 찾아먹게 됐다.
힘들게 뛰고 배부르게 밥도 먹었겠다, 게다가 맥주까지 한 잔 했더니 몸이 너무 노곤노곤해졌다. 각자 집으로 가야 할 길은 멀다 보니 갑자기 아득해졌다. 뛸 때 보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야 하는 시간이 더욱 더디게 느껴졌다. 밤새도록 친구들과 놀고 아침 첫차를 타고 갈 때처럼 몽롱하고 지치고 늘어져만 갔다. 겨우겨우 집에 도착한 나는 씻지도 않고 거실 바닥에 누워버렸고 방전된 배터리마냥 그대로 꺼져버렸다.
오히려 체력이 훨씬 좋아진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의 나는 정말 저질 체력이었고 그런 주제에 연습도 없이 대회를 나간 것도 어떻게 보면 대단하지 싶다. 역시 모르는 게 약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번 레이스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달리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