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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Feb 18. 2023

기안지에 회장 결재란이 왜 있는 걸까

우월적 지위의 잔재로 남은 잘못된 관행

   아직 한 겨울인데 아파트 여기저기서 물이 샌다는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난방과 관련되는 누수 민원은 추운 날씨에 지체하기 어려운 긴급 사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안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난방은 물론, 밥을 하거나 세수도 해야 하니 어느 집이든 잠시도 중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가급적 제기되는 민원에 신속하게 대응하여 입주민들의 불만을 대폭 줄여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조치가 지체되고 숙제처럼 쌓이면 불평과 불만이 덩달아 이어지며 감정도 상했던 작년의 경험을 또다시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부터 열심히 뛰겠지만, 직원들이 하는 일을 좀 더 꼼꼼하게 챙기고 관리하는 역할이 부족했다는 반성의 교훈이다.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했다.




   그동안 쓰는 둥 마는 둥 하던 민원대장을 적극 활용하기로 하였다. 전화나 방문 등으로 접수되는 민원을 직원들이 빠짐없이 대장에 기록하도록 하였다. 나는 진행상황을 일일이 결재함으로써 그들이 책임감을 갖고 대처하도록 독려하고 관리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같은 일이지만, 관리감독 역할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꾀했다. 작년에 비해 성과가 두드러지게 좋게 나타났다. 가슴을 쓰려내리는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직원들 몰래 흐뭇한 기분을 맛봤. 특히 젊은 사람들이 흥분해 도대체 언제 해줄 거냐고 재촉하거나 큰소리치고 대들듯 따지는 예는 올해 들어서는 아직 없었다. 그런 사태를 미리 차단할 수 있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기뻤다. 감정적 앙금이나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은 곧 나의 자존과 존엄을 지키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어제도 물이 새는 저층 세대의 공용부 난방배관을 전문업자에게 의뢰하여 수리를 하였다. 누수부위를 찾는데 다소간의 시간이 걸렸지만, 실제 작업은 부실한 연결관을 새것으로 바꿔 끼우는 것으로 간단히 마칠 수 있었다. 수리비는 15만 원으로 소액이었다. 기전과장인 최 과장은 다른 업체 견적서와 함께 복수견적서를 챙겨 품의용 기안문을 작성하고 나에게 가져왔다. 결재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회장님 결재를 받고 처리하겠다는 수순이다.



   관리업무의 의사결정은 입주자대표회의의 의결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동별 대표자들 다수의 의견을 좇아 과반수 이상 다수결로 결정하라는 것이지 대표회장 한 사람의 결심으로 결정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의사결정구조가 수평적이어야지 수직적으로 운영돼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이번 보수작업이 긴급사항이 아니라면, 안건을 먼저 입주자대표회의에 상정하고 심의, 의결하는 절차가 선행되어야 한다. 관리소장은 의결사항을 충실히 집행하면 된다. 그것이 원칙이고 절차다. 다만, 이번 난방관 보수는 긴급사항의 처리요령에 따른 예외적인 경우였다. 먼저 시급히 처리하고 난 연후에 입주자대표회의의 동의를 사후에 구하는 절차가 불가피하였다.



   최 과장처럼 회장의 결심을 받기 위한 품의서는 사실 필요가 없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습관적으로 되풀이되는 일이어서 나 역시 반복적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 그렇게 한다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사실 대부분의 관리사무소에서 회장의 결재를 반드시 받아야 하 관행처럼 인식하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그의 말이 전혀 틀렸다고만 나무랄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회장의 결재를 꼭 받아놔야 안심이 되고 면피를 할 수 있는 근거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문제다. 기안지에 회장 결재란을 버젓이 만들어놓고 있는 자체가 회장의 존재감을 드러내주는 것에 불과하다. 근거가 없는 관행이다.



 

   입주자대표회의가 의회 격이라면, 회장은 의회의장이나 다름없다. 흔히 관리업무를 지탱하는 두 바퀴 중 하나라고 일컫는 관리소장은 행정부 수반쯤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회장이 소장 다음에 결재하는 행위는 의사결정하는 기구의 의장이면서 동시에 행정부 수반 위에서 지휘하는 격이나 다름이 없다. 결과적으로 의사결정도 하고 집행도 하면서 권한을 혼자 다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그게 현실이지만, 모순이다. 차라리 결재하고 마땅히 책임도 분담한다면 관리소장의 부담감은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허무한 상상에 불과하다. 회장에게는 결재 권한도 없지만 그에 따른 응분의 책임을 부담하는 일도 없이 결재관행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법에도 없고, 관리규약에도 없다. 입주자대표회의가 관리업체에 관리업무를 위탁한 엄연한 계약관계를 생각해 보면 진즉 사라지고 개선됐어야 한다. 계약을 통해 일을 위탁해 놓고도 수탁자가 하는 일에 버젓이 결재를 하고 있으니 이건 모양이 너무 우습지 않은가.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잔재에 불과한 관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강조되어야 할 점은 법에도, 관리규약에도 명시된 감사의 역할이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최 과장은 선 조치 후 보고라 하더라도 이번 사안을 회장 결재를 득하는 것만으로 안심할 이 아니다. 소장이 정식 안건으로 회의에 상정하고 추인을 받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현행 규정상 금액의 많고 적음은 의결사항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기준이 아니다. 한편, 의결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도 없지는 않다. 이번 15만 원짜리 보수공사가 그 한 예다. 온갖 자질구레한 일까지 모두 회의에 부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너무나 번거롭고 비효율적이라는 생각다. 소장이 신속하고 적법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길을 정비하고 명확히 터줄 필요가 있다. 소장은 신뢰받을 수 있도록 정직해야 함은 물론이다. 의사결정방식에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혼동과 고민이 하루빨리 제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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