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 사일. 세인트 킬다 바닷가
나의 행복은 세인트 킬다 바닷가에 잠들어 있다.
멜버른 동물원 첫 화에서 어제와 오늘이 멜버른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날이라고 쓴 것을 기억하는가?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오고 피날레가 극에서 가장 도드라지듯이 나의 이틀도 마지막이 그 정점이었다.
야라 강변을 구경하고 트램을 타면 30분 뒤에 트램이 피츠로이 가에 다다른다. 우리가 그 거리에 다다랐을 때는 해가 지기 시작할 때라 햇살이 강렬했다.
나는 바닷가 이미지를 떠올리면 백사장이나 노란 모래사장을 떠올리고는 했는데 세인트 킬다 바닷가는 그 옆에 카타니 공원에 있어서 그런가, 푸르른 잔디가 먼저 보였다. 모래사장과 맞닿아 있는 잔디밭. 그날의 옷과 햇살이 어우러진다 싶어 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고, 그 사진은 나의 호주 여행기 사진첩의 첫 번째를 장식한다.
해변가를 걷다 보니 바다를 향해 길게 놓인 부둣가가 있어 그곳을 타박타박 걷기도 했다. 부둣가 끝에는 작은 식당이 있었는데, 우리가 저녁을 해결할 곳은 바닷가 근처 식당이어서 그곳은 잠깐 사람들을 따라 걷기만 했다.
부둣가 끝까지 걷고 보니 문득 뒤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오묘한 빛깔의 하늘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내가 지난 나흘을 보낸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불 켜지지 않은 가로등에서 곧 빛이 점멸할 듯 했다. 고르고 골라 딱 두 장만 남긴 사진이다. 한 해가 지나도 내가 사랑하는 배경 사진이다.
다시 바닷가로 돌아갔다. 모래사장에 들어가기 전 돌담이 야트막하게 있어서 그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귀니를 안고 찍거나 혼자 돌담에 걸터앉아 저 먼 태양을 바라보며 찍거나 알라와 함께 셀카를 찍었다. 남는 게 사진뿐이란 걸 이때도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풍경만 멍하니 바라보다 왔으면 희미한 기억만 안고 아쉬워했을 것 같다.
한참 사진을 찍고 나서 경사로를 따라 바닷가에 들어가 모래사장을 사부작거리며 걸었다. 모래사장을 가면 운동화에 모래 들어간다며 안 갈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모래에 발이 빠지는 느낌도 그때는 생경해 오래오래 모래를 밟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모래가 운동화에 들어갔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기억에 남는 건 모래사장 위를 밟은 느낌뿐인데, 그럴 거면 호주에 오기 전에 바다에 갔을 때도 모래사장에 들어갈 걸 그랬다.
내가 호주에 가져간 셀카봉 밑부분은 3단으로 펼쳐져 셀카봉 혼자서도 일어설 수 있었다. 바닷가에 잘 고정해놓고 모래 위에 철푸덕 앉아서 독사진을 찍기도 했다. 알라와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 행복이 멍멍 소리를 안고 달려왔다. 사진을 찍기 위해 셀카봉과 연결된 리모컨 버튼을 마구 누르고 있었는데, 우리와 마찬가지로 바닷가를 산책하던 갈색 닥스훈트가 알라를 향해 달려온 것이다. 알라의 곁에 납작 엎드려 그를 향해 고개를 치켜든 강아지는 한참이나 꼬리를 흔들며 재롱을 피웠다. 저 멀리서 주인이 이름을 부르자 다시 주인을 향해 달려갈 때까지, 우리는 달려온 행복을 웃으며 반겨줬다.
연타하는 리모컨과 그 결과물을 보자 그제야 나는 사진이 순간을 영원으로 만든다는 걸 느꼈다. 행복이 머문 건 아주 잠시였지만 그걸 나는 운 좋게 붙잡아 오랫동안 추억하고 있다.
박원자 시인의 ‘소년, 너를 보면’이라는 시가 있다. 전문을 하단에 적어뒀으니 꼭 읽어줬으면 한다. 그 시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너를 바라보면 광활한 우주가 다가오고
너는 커다란 지구를 굴렁쇠처럼 굴린다.
이 구절을 읽으면 그때 다가온 강아지가 내게는 소년 같다. 나에게 커다란 행복을 굴렁쇠에 담아 굴리며 다가온. 팔랑거리던 귀와 짤뚱한 허리를 바라보면 광활한 행복이 다가온.
행복을 담은 사진을 남길 수 있어 더욱 잊을 수 없는 바닷가다.
그래서 나의 행복은 세인트 킬다 해변 바닷가에 잠들어 있다.
박원자, 소년, 너를 보면
소년 너를 보면 맑은 하늘에도 무지개가 뜨고
사막에도 푸른 초원의 빛이 다가온다
너를 생각하면 한겨울에도 봄이 오고
영롱한 아침이슬이 강물 되어 흐른다
너를 보면 가슴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고
캄캄한 밤바다에 등대불이 반짝인다.
너를 바라보면 광활한 우주가 다가오고
너는 커다란 지구를 굴렁쇠처럼 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