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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역하는 엄마 Jan 25. 2021

애 둘 키우며 번역가로 살아남는 법

저는 프리랜서 일을 시작하고 이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한 번 일을 거절하면 그곳에서는 더 이상 일을 받기 어렵다." 그래서 초반에는 저도 들어온 일은 무조건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꼭 일은 몰리더라고요. 일이 없을 때는 전혀 없다가 슬슬 들어오기 시작하면 여지없이 마감이 겹치거나 하루 이틀 상간으로 마감이 연달아 걸리곤 해요. 머피의 법칙처럼 말이죠.


그렇게 2-3년을 보낸 것 같아요. 번역 시장에 발을 처음 내디뎠을 땐 애들이 어려 한창 제 손이 많이 갈 때였는데도 말이죠. 어떻게든 초반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참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애들 재워 놓고 일하고, 주말에 남편한테 또 친정집에 맡겨 놓고 일하고. 책 번역도 그 즈음에 가장 많이 한 것 같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나 왔나 싶습니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시는 분들은 잘 아실 거예요. 언제 일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불안함. 생계형인 경우에는 더하겠죠. 일이 계속해서 주어지지 않으면 당장 생계가 곤란해지는 상황이니까요. 감사하게도 저는 남편의 고정 수입이 있었기에 수입에 대해서는 크게 압박이 없었어요. '돈 안 되는' 출판번역을 계속 이어온 것도 어쩌면 그런 환경이었기에 가능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하나, 둘 거절하다가 결국 일을 못 하게 되면 어떡하지? 나를 찾아주는 곳이 없으면 어떡하지?' 이런 불안은 늘 안고 살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 어려운 공부 하고, 그 비싼 등록금 내고 돈과 시간을 투자했는데 결국 이도 저도 아니게 되면 어쩌나. 그런 막연한 불안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거절 없이 그토록 매달렸는지도 모르겠어요. 내 이름 석 자를 놓지 않으려고.


그렇게 '내 사전에 No!는 없다'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달렸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애들한테도, 또 제 자신에게도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전략을 바꿨습니다.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면 솔직하게 양해를 구하고 일을 거절하기로. 물론 다시는 일을 못 받을 수 있다는 각오도 했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 즈음, 그리고 지금도 제 우선순위는 번역가보다는 엄마라는 이름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상황은 제가 생각한 것만큼 그리 나쁘게 굴러가지 않았어요. 첫 역서부터 지금까지 20권 가까운 책을 함께 작업한 에이전시 팀장님, 대학 선후배의 인연으로 굵직한 대표 역서를 함께 펴낸 에이전시 대표님, 햇수로 4년째 제가 속한 외신 번역 팀을 이끌고 계신 편집장님. 모두들 누구보다 제 사정을 이해하고 배려해 주셨어요. 한두 번 거절했다고 저를 내치는 곳은 없었습니다.


사실 지난주에도 책 번역 의뢰가 왔었거든요. 그런데 두 아이가 온전히 집에만 있는 상황이라 책 작업은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더라고요. 책 번역은 기간도 길고 매일 일정량을 소화해야 해서 지금 제 상황에서는 무리라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팀장님께 솔직하게 사정을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팀장님은 흔쾌히 알았다고 하시며 빨리 상황이 나아져 3월쯤엔 다시 작업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하셨어요. 어찌나 감사하던지요.


아이들이 집에 있어 내가 원하는 만큼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은 속상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찾아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참 감사하다고요.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번번이 일감을 거절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분들이 나와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가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리랜서 번역가는 차고 넘침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게 일감을 주고, 나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진심과 신뢰라는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을 거절해야 하는 상황이면 저는 솔직하게 그 이유를 말씀드려요. 대충 얼버무리거나 거짓으로 떼우진 않습니다. 마감이 바쁜 다른 일을 하고 있든, 아이들 때문에 발목이 잡혀 있는 상황이든 있는 그대로 말씀드려요. 물론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신뢰 관계가 구축돼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제가 거래하는 곳은 대부분 최소 3년 이상 함께 손발을 맞춰온 곳들이거든요.


그렇게 제 상황을 오픈해서 말씀드리면 대부분 흔쾌히 다음 기회를 기약해 주십니다. 그럼 저는 또 번번이 제 사정을 봐주신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일을 맡을 때면 늘 정성껏, 기한을 엄수해 작업을 합니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역서가 나오면 소소하게 기프티콘 선물로 제 마음을 전하기도 하고요. 그럼 또 아이들 주라고 빵이며 잼이며 작은 정성을 되돌려 주시기도 합니다. 이렇게 진심과 신뢰를 기반으로 관계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늘 진심으로 상대방을 대하고, 그것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는 것. 이것은 비단 개인과 개인뿐 아니라 직업인으로서 맺는 관계에 있어서도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나마 번역가로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이분들 덕분이지요. 아이 둘 기르며 수시로 이런저런 상황에 부딪치는 저를 끝까지 믿어주시고 함께 손잡아 주신 이분들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번역하는 엄마'는 없을 테니까요. 앞으로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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