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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실 Oct 27. 2020

의심의 시작

정치하는엄마들 활동이 내게 허락해 준 것들

2017년 4월 22일, 나는 젖먹이 아이와 네살배기를 품에 안고 낯선 좌담회에 참석했다. 이름하여, <엄마의 삶, 그리고 정치>. 전국 각지에서 삼십여명의 엄마들이 모였고, 이들의 이야기는 <정치하는엄마들 창립준비위원회(이하. 창준위)>로 이어졌다. 단 오십여일만에 창립총회를 치뤘고 그렇게 비영리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이 시작되었다. 

사람은 삶의 어느 기간 혹은 모든 기간 동안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해 반드시 타인에게 의존하게 된다. 즉 사람은 생존을 위해 돌봄과 살림을 필요로 하고, 서로 돌봄과 살림을 주고받는 존재다. 이렇듯 돌봄과 살림은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 가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이를 사사로운 일로 치부하며 사회적·국가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출산과 육아, 자녀의 교육, 일상적인 가사노동, 간호 등 돌봄과 살림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단지 ‘집안일’이라는 말로 폄하하며, 그 책임을 오로지 ‘엄마’에게 전가해왔다. ‘모성’과 ‘모성애’라는 이름 아래 많은 여성들이 희생과 헌신을 강요받았고, 정치경제적 주체로서 자립할 기회를 박탈당했으며, 아줌마와 맘충이라 불리는 혐오와 비하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무릇 사람을 낳고 기르고 살리는 돌봄과 살림은 우리 사회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가 달린 일로서 엄마·여성·개인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되며, 가족 공동체·지역 공동체·국가 공동체가 서로 함께 책임져야 할 영역이다. 이제 모성은 생식적 어머니와 분리하여 돌봄과 살림을 수행하는 모든 주체의 역할을 가리키는 개념이 되어야 하고, 우리 사회는 집단 모성·사회적 모성을 추구해야 한다. 나아가 혈연을 넘어서 돌봄과 살림의 관계를 기준으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포용해야 하며, 가족구성원 간의 성평등한 관계를 법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 모성을 바탕으로 모든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돌보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그들이 처한 정치적·경제적·사회문화적 모순을 해결해 나감으로써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이에 우리는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통해 이러한 목표들을 실현하고자 모인 구성원들의 뜻을 모아 ‘정치하는엄마들’을 창립한다. 

출처 : 정치하는엄마들 홈페이지

창준위의 사무국장으로 단체의 첫 공동대표로 지낸 몇년의 시간은 내 삶의 방향을 드라마틱하게 바꾸어놓았다. 각종 인터뷰에서 기자회견장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아이와 함께 행복할 권리'에 관해 외쳤고 엄마로서의 자유를 역설해왔다. 이 땅의 아이들과 아이를 돌보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제약해 온 사회적 부조리를 고발했고, 변화를 주도할 주체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란 사실도 강조해왔다. 편견 없이 그저 서로를 믿고 서로에게 마이크를 내어준 이들 덕분에, 더 많은 정치하는엄마들과 연결되었다.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및 유치원 3법 입법, 비롯해 크고 작은 변화가 이어졌다.


그 길 위에서, 역설적이게도 나는 

엄마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진 내 자신을 발견했다.


지난 토요일 아이들을 맡기고 혼자 운전해 정치하는엄마들 정기집담회를 가던 길이었다. 한강 주변을 달리고 있는데 불현듯, 끊임없이 나를 붙들던 그 손,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시나브로 자유해진 내 자신을 발견했다. 엄마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외쳐 온 투쟁의 순간들, 그 와중에 '엄마의 딸'로서 자유로워진 내가 서 있었다.


"미안 엄마, 그치만 내 잘못은 아니었어."

내 입을 툭 튀어 나온 혼잣말.


그렇다.

내 잘못은 아니었다.

내 탓은 아니다.


내가 느껴온 분노, 상처, 혼란 이 모든 것들이 정당한 감정이었고, 내가 바랐던 것들이 우리의 당연한 권리였음을 인정하면서 비로소 엄마를 마음껏 놓아드렸다.


내 20대를 관통하던 후회, 미안함, 죄책감 이 모든 것들이

내 것이 아니었음을.

엄마의 자유를 구속하고,

여러 형태의 폭력과 차별로부터

우리엄마를 지켜주지 못한 무책임의 근원이,

할 수 있는게 거의 없던 어린 아이 조성실이 아니라,


이 사회의 잘못된 구조였단 사실.


그 사실이 비로소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 사실을 인정한 순간, 엄마는 내게 더 이상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마음의 손을 내밀어 엄마와 연대한다. 우리는 평생을 동행할 벗이자 동반자가 된다.


엄마의 문제를 위해 대신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 괴롭던 나, 누구에게 소리쳐야 할 지 분노해야 할 지 몰라 종종대던 나 자신은 사라졌다. 엄마를 대신 해 싸워주지 못했단 자괴감에 또 무력감에 움츠렸던 아이가 사라진다.


엄마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이고,

이 문제가 곧 내 아들과 딸들의 문제임을,

그래서 우리가 연대해야함을 소리치는 나만 남았다.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다. (2017년 10월 19일의 일기 중에서)


나를 짓눌렀던 그림자의 무게는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나 외에도, 저마다의 죄책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다. 누군가의 그림자를 딛고 선 오늘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외치는 사람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변화를 꿈꿔가는 이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용기가 되고 새로운 길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안도했다. 당연한게 아니었구나, 혼자가 아니었구나, 그리고 우리 함께라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겠구나, 싶어서.


다른 아이의 아픔은 곧 나의 눈물이 되었다. 기사와 책으로만 알아왔던 다양한 형태의 가족과 사람들을 직접 만날 일이 많아졌다. 한 시인의 시구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그 만남들로 인해 나는 비로소, 그간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많은 것들을 새롭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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