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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Aug 20. 2021

바알간 저녁의 고백

<They Say It's Wonderful>by만토바니&오케스트라

https://www.youtube.com/watch?v=Eo_Ward5pIM








  신호등에 걸려 횡단보도를 앞에 두고 정차해 있을 때 그런 차들 가끔 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좀이 쑤시는지 슬금슬금 슬금슬금... 

 정지선을 넘어가더니 이내 횡단보도 중간까지 침범해 들어가곤 하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 그리고 볼 때마다 화가 나는 걸. 

 빨간 불일 땐 섰다가 초록 불이 켜지면 가면 되는 거 아니겠어? 뭐가 어려워.

 차분하게 기다렸다가 신호가 바뀌면 탄력 있게 출발하라구, 정 바쁜 일 있으면.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지. 슬금슬금 기어가다니, 쩨쩨하기는.


 맞아. 우리 만난 지 얼마 안 된 지금 털어놔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운전할 때만큼은 고지식해 나는.

 싫어해도 어쩔 수 없지만(아니, 싫어하지 마 제발) 운전할 때는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것도 아닌 누군가의 생명까지 좌우할 수 있는 게 운전습관이잖아, 처음부터 잘 배워두어야 한다고.


 하아... 그런데 말이야.

 내가 그러고 있는 거 알아, 요즘? 

 기면 기. 아니면 아니. 똑 부러지게 행동을 하고 싶은데, 그래야 더 멋져 보일 것 같은데

 그게 안되거든.

 남자답게 너를 리드하고, 당당하게 난 이런 사람이다, 넌 어떤 사람이냐. 

 때로는 태풍같이, 때로는 불길처럼 거침없는 모습을 보이고 싶은 게 내 마음인데  

 그게 안된단 말이지.


 마치 횡단보도를 슬금슬금 침범하는 밉상 운전자처럼.

 빨간 불이 켜져 있어도, 혹시나... 하는 곁눈질과 동시에 발 한쪽을 네가 있는 곳으로 들이밀질 않나. 

 초록 불로 바뀐 게 분명한데도 힘차게 가속페달을 밟지 못하고 찔끔찔끔 가다 섰다를 반복하질 않나. 

 한심해. 집에 돌아가서 이불 킥만 며칠째인지. 


 너에게 이토록 빠지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남자다운 매력을 뿜어내며 널 반하게 하기 더 쉬웠을 텐데. 자연스럽게 행동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어려운 건가 봐, 사랑에 빠지면.

 내 매력은 드러나지 않고, 우유부단 좌고우면 갈팡질팡하면서 들키기 쉬운 마음만 흘리고 다니니 말야.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인가 봐. 


 그런데 한번 더 생각해 보면.

 '볼이 불그스름해지면서 어리숙해지는 사랑에 빠진 자'

 귀엽지 않아?

 이 사랑은 진짜다! 하고 떨리는 순간에도 철옹성같이 굳건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거 아닐까?


 맞아, 잘 좀 봐달라는 말이야.

 실수투성이에다 왜 저러지 싶게 부자연스럽게 보여도 이해해 달라는 거야.

 평소엔 안 그러니까.

 너에게 홀딱 빠져서. 반해서. 이렇게 된 거니까.

 귀엽지 않아? 귀엽게 생기지 않은 거 알아. 그래도 귀엽게 봐 달란 말이야.


 혹시 네가 내 마음 받아줘서, 내가 더 이상 어리숙하지 않게 되어도 오해는 사절이야.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콩깍지가 벗겨져서가 아니라.

 네가 준 사랑에 안도를 해서 그런 거니까. 마음이 편해져서 구름 위에 누워있는 것 같아 그런 걸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귀엽게 넘어가 주고

 나중엔 멋지게 지켜봐 줬으면 좋겠어.

 나 이 사랑의 씽크홀에서 빠져나오긴 글렀으니, 변할 거란 걱정은 에너지 낭비일 뿐이야.


 나 너 좋아해. 미치도록.


 

 
 얼굴이 변하는 거 알아? 너 말이야. 

 세련되게 각이 진 보석에서 어느덧 들꽃이 되어 버리지.

 변검이라도 하는 건지.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멋져 보이는 건 남자들뿐만이 아니야. 

 네가 출근해서 일하는 모습만 보다가 너와 함께 퇴근하고 싶을 정도야. 방해되겠지? 그렇게 하진 않을게.

 공기가 자유로워지면 넌 금세 소녀로 변신해 버려. 

 이런 카멜레온이 있나.

 얼굴이 변한다고 했지만 네가 뿜어내는 기운이 달라진다는 얘기야.

 그 기운 다 들이마시고 싶어. 밥 안 먹어도 살 것 같을 거야, 그렇게 된다면.


 사랑에 빠져 속이 쓰리네.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해서 쓰린 건 분명히 아니야. 알 수 있어.

 그 단계까지 한 발도 가지 못했어도 

 네가 내 안에 가득해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서 속이 답답하고 쓰린 거야. 

 왜 이런 증상을 가라앉히는 약은 없는 거야?

 왜 상사병 전문의는 없는 거냐구, 대놓고 말이야.

 <생로병사의 비밀>은 사랑으로 아픈 사람들에게도 정보를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불만투성이야.

 이러다 사회생활은 낙제점의 연속일 것 같아.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있잖아.


 문을 열어줘서 영광이야.

 나 막 그 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거든.

 걸음걸이부터 시작해서 꼼꼼히 잘 지켜보다가

 맘에 안 드는 거 있음 언제라도 혼내고 꾸짖어도 좋으니, 그게 뭔지만 알려줬음 해.

 아까도 말했지만

 처음엔 많이 멍청할 거야, 예고할게.  

 문을 열어준 것만도 고마운 일이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지켜봐 준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


 황홀함에 어지러워 휘청거리다가도 이내 정신 차리고 사랑에 집중할게.

 너와 나라는 블록을 하나씩 맞춰가면서 왜 어긋나는 일이 없을까.

 삐걱대고 덜컹거리는 일이 왜 없겠어.

 너에게 취해 몽롱한 지금이지만 

 꽃길만 걸을 거라 자신하진 않을 거야. 가시밭길도 더러 놓여 있겠지.


 각오는 돼 있어.

 그 가시밭길을 건널 각오 말이야.

 어떻게 건너야 하나... 너무 깊게 생각하다가는 

 네가 도망갈지도 몰라. 그렇지?

 그래서.


 건널래 그냥.

 널 번쩍 안고.

 내 발만 가시에 찔리면 되니까. 

 그렇게 갈래.

 가시에 찔린 발바닥의 아픔이

 너와 함께 하지 못해 뒤덮을 심장의 통증보다 한결 견디기 쉬울 거 아니겠어?


 비웃어도 좋아 지금은.


 1년 뒤 오늘 다시 돌아보자구.

 10년 뒤 오늘 다시 따져보자구.


 슬금슬금 널 향해 다가가던 주저함의 자동차는

 원하는 곳 어디는 널 데려가는 날렵한 비행기가 돼 있을 테니까.


 더 털어놓으면 허풍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내일부턴 한 발짝 더 들어갈 거야.

 너 문 열어줬으니. 

 

 지금까지

'볼이 불그스름해지면서 어리숙해진.

 사랑에 빠진 자'

 의 고백이었어.


 가시 밟을 일 조차 설레는.


 이 기분 좋은 저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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