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이면 ‘아모르 파티’

미니시리즈를 마치며, '우리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by Itz토퍼

인생은 좀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하나의 ‘우물’에 모든 것을 걸고, 나머지 삶의 조각들은 ‘나중에’라는 이름으로 뒤편에 쌓아두곤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최선의 선택일까요? 만일 온 힘을 다해 판 그 우물에서 기대만큼의 물이 솟아오르지 않는다면, 혹은 그 물이 우리가 미뤄두었던 삶의 기쁨과 맞바꿀 만큼 충분하지 않다면, 그때 우리는 어떤 이유로 이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할까요?


세월은 급하게 흐르고, 세상도 변하고 있습니다. 물론 삶의 방식도 변하고 있겠죠.


by ChatGPT

과거 우리에게 연탄은 필수품 그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부엌의 조리용부터 방의 난방용, 거실의 난로용, 공장의 보일러 가동에 이르기까지 겨울을 버티게 해주는 절대적인 존재였죠.


그런데 연탄도 그 종류가 참 다양합니다. 구멍의 개수와 크기에 따라 용도가 확연히 갈리기 때문입니다. 취사용 ‘구(9)공탄’은 구멍이 적어 불이 빨리 붙고 강한 화력을 내지만, 그만큼 빨리 타버립니다. 반면 구멍이 20개 이상인 ‘이십공탄’이나 ‘이십이공탄’은 연소가 매우 안정적입니다. 불길을 한 곳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사방에서 공기를 골고루 받아들이기에, 화력은 온화하되 그 온기는 장시간 지속됩니다. 대형 시설이나 공동 난방에서 이 연탄을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그 ‘지속성’과 ‘안정감’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네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잘하는 한 가지, 혹은 남들이 인정해 주는 화려한 모습에 불을 붙이려 합니다. 성취와 성공, 그리고 성격의 밝은 면만을 삶의 중심에 두고 나머지는 외면하거나 희생시키며 질주하곤 하죠. 그런데 과연 지금도 이게 통할까요?


한 연예인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이들이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느냐는 질문에, "어려서부터 모든 에너지를 단 한 곳에만 불태웠기 때문"이라고요. 삶의 모든 구멍을 막아둔 채 오직 한 곳으로만 화력을 쏟아붓다 보니, 그곳에서 조금만 삐끗해도 인생 전체가 끝난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밤하늘을 잠시 밝히고 사라지는 불꽃놀이처럼 말이죠. 부족하면 어떤가요, 실패하면 또 어떤가요. 그 또한 '나'인데.


인생은 기쁨뿐만 아니라 실패와 상처, 불안과 망설임까지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고르게 타오릅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지만, 그 운명 안에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고통의 구멍들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삶의 모든 구멍으로 공기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요란하지 않더라도 끝까지 꺼지지 않는 은은한 온기를 유지할 수 있답니다.


조금 무거운 이야기였나요? 이제 우리 주변의 편안한 풍경으로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사계절 중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시나요?


아마 생동감 넘치는 봄이나 화려한 가을을 꼽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절’이라는 큰 틀 안에서 그 모든 시간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시린 겨울의 혹독함 없이는 봄의 환희가 완성되지 않고, 뙤약볕의 고단함 없이는 열매의 풍성함이 맺히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뿐이 아니죠, 땀 흘리는 수확의 계절이 없다면 지나온 모든 계절은 결국 무의미해지고 말 겁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는 단순히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라"는 체념의 권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삶에 일어난 모든 일, 심지어 나를 무너뜨렸던 고통과 상처조차도 "그것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다"라고 긍정하는 능동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왜 굳이 고통스러운 운명까지 사랑해야 할까요?


첫째, 거부할 수 없는 것을 거부할 때 인간은 가장 괴롭기 때문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거센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려는 것과 같습니다. 운명을 거부하는 데 쓰는 에너지는 결국 나를 갉아먹는 분노와 우울로 돌아옵니다. 강물의 흐름을 바꾸려 애쓰기보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 속도를 동력 삼아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노를 저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운명을 사랑하는 자의 지혜이자 영리함입니다.


둘째, 고통은 삶의 '불순물'이 아니라 '원석'이기 때문입니다.


빛나는 순간들만 모아놓는다면 그것은 한 편의 지루한 동화일 뿐, '나'라는 입체적인 인간의 역사가 되지 못합니다. 비바람이 나무의 뿌리를 깊게 만들고, 파도가 바위의 모서리를 깎아 보석 같은 조약돌을 만들듯, 우리를 무너뜨렸던 운명의 파편들은 우리 내면의 다양한 모자이크를 만듭니다. 그 아픈 시간들까지 나의 일부로 긍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깨지고 흩어진 조각이 아닌 '온전하고 단단한 자기 자신'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셋째, 운명의 주인으로 다시 서기 위해서입니다.


운명을 혐오하거나 회피하면 우리는 환경에 휘둘리는 ‘수동적인 희생자’에 머물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고통조차 나의 삶이다"라고 선언하며 그것을 껴안는 순간, 고통은 나를 짓누르는 돌덩이가 아니라 내가 다루어야 할 '삶의 재료'로 변모합니다. 비극을 기꺼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비극을 딛고 다음 장을 써 내려갈 진정한 용기를 얻게 됩니다.


결국 운명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타인을 위해서도, 세상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삶에 뚫린 무수한 구멍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멍들이 있기에 비로소 공기가 순환하고 불꽃이 오래도록 타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성숙함입니다.


내가 나의 운명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 세상이 나에게 던진 돌들은 나를 가두는 벽이 아니라 내가 딛고 올라설 단단한 계단이 됩니다. 어떤 풍랑 속에서도 "이것이 나의 운명이고, 나는 이것마저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긴 밤을 끝내 온화하고 따뜻하게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끝내 '아모르 파티'를 외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미니시리즈, 아모르파티』


제1편: 상처까지 사랑하며, 다시 만난다면

제2편: 오타 하나에 지구가 멸망하나요

제3편: 우리가 몰랐던 아모르 파티의 흑역사

제4편: 무너진 운명조차 사랑할 용기

제5편: 인생이라는 랜덤 박스를 사랑하자

제6편: 왜 하필이면 ‘아모르 파티’인가?

unnamed.jpg AUTUMN FATI = 나다움의 완성 / by Gem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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