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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분(秋分)을 지나

가을 시 5편

by 제갈해리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秋分)을 막 지났습니다.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이제 드디어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의 초입에 다다랐습니다. 여름내 푸르던 잎새들이 하나둘씩 노랗게, 빨갛게 수채화 물감을 탄 듯 점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노란 은행나무에서는 살구빛이 감도는 은행 열매가 우수수 떨어지고 있습니다. 사과나무와 감나무는 결실의 시기인 가을이 맞이해 과실이 점차 차오르고 있습니다. 집 앞 논에서는 노오란 벼가 고개를 조금씩 숙여가며 풍성하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산책을 나서면 즐겁습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알맞은 시원한 온도와 청명하고 화창한 하늘, 그리고 숨을 들이쉬기도, 내쉬기도 전혀 불편함 없는 깨끗한 공기.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져 정말 산책하기 딱 좋은 시기입니다. 오늘은 산책을 하는데, 비가 오락가락 가랑비처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도 비라면 괜찮겠지, 하고 산책을 한참 동안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듯이 어느덧 머리카락과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저는 산책에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가을 시를 찾아보았습니다. 가을 시를 보면서 가을의 정취를 좀 더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본 시가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도종환의 《가을 사랑》, 안도현의 《가을 엽서》, 나태주의 《멀리서 빈다》, 이해인의 《단풍나무 아래서》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5편의 가을 시를 소개해 드립니다.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 [가을의 기도], 시인생각, 2013
가을 사랑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가을 엽서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곳에 있는지를
멀리서 빈다

나태주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그대 머물며 꽃처럼 웃나니
세상에 한 사람 그대가 있어
다시 한 번 아침이 눈부시다

그대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내 머물며 풀처럼 숨 쉬나니
세상에 한 사람 내가 있어
다시 한 번 저녁이 고요하다

가을이다, 부디 그대 아프지 마라.
단풍나무 아래서

이해인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다
문득 그가 보고 싶을 적엔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별을 닮은 단풍잎들이
황홀한 웃음에 취해
나의 남은 세월 모두가
사랑으로 물드는 기쁨이여

마음속에 가득 찬 말들이
잘 표현되지 않아
안타까울 때도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세상과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저절로 기도가 되는
단풍나무 아래서
하늘을 보면 행복합니다


가을 시 5편을 감상하고 오신 느낌이 어떠셨나요? 저는 이 시들을 읽어보고, 뭔가 가슴이 뭉클해지고,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을이야말로 사랑의 계절이요, 결실의 계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가을 시를 추려 모아봤습니다. 다음 번에도 좋은 시로 찾아뵙겠습니다. 행복한 가을 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추분(秋分)을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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