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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Oct 28. 2019

#17 영주의 일요일

소설 연재

서점을 열고 줄곧 일요 휴무를 고수해온 영주에게 차라리 월요일에 쉬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언해오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서점은 주말 장사라는 타 서점 대표들의 말도 더러 들었다. 수익을 생각하면 ‘그래야 하나’ 하고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영주는 오히려 반대로 ‘서점이 자리가 잡히면’ 대표인 그녀도 주 5일 근무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들뜨곤 했다.


그런데 과연 ‘서점이 자리가 잡힌다’는 의미는 뭘까. 직원에게 충분한 월급을 줄 수 있고 사장 자신도 먹고 살만큼 벌게 된다면 서점이 자리가 잡힌 게 되는 걸까. 아니면 다른 사업과 마찬가지로 ‘돈 좀 벌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통장에 숫자가 척척 늘어나야지만 자리가 잡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의미가 뭐든 간에 영주는 휴남동 서점이 영원히… 영원히! 자리를 잡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최근 들어 부쩍 하고 있었다. 영영 자리를 잡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정대로 서점을 접는 게 맞을까, 아니면 다른 방법이?


이런저런 고민은 많더라도 여전히 일요일은 달콤하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에 들 때까지 온전한 자유다. 내향성 성향과 외향성 성향을 고루 지니고 있는 그녀에게도 사람 대하는 일은 벅차다. 일을 하다가도 한 두 번씩은 잠시 혼자 있고 싶다는 바람이 강렬하게 든다. 내향성을 다독이지 못하고 하루를 몽땅 보내버린 밤이 되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한다. 차분히 앉아 단 한 시간이라도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래서 일요일이 소중하다.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사람을 대하는 긴장에서 벗어나고 싶다.  


영주는 9시에 눈을 떴다.  세수를 하고 나서 커피를 한 잔 내렸다. 커피를 마시면서는 오늘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생각해봤자 별 일 하지 않는 하루를 보내리라는 걸 영주도 잘 알았다. 배가 고프면 냉장고에서 눈에 보이는 아무 음식이나 꺼내 먹을 테고, 아침을 먹고 나서는 예능 프로그램 몇 편을 다운 받아 몇 시간 실실 웃으며 볼 것이다. 아침을 먹는 일도, 예능을 보는 일도 책상에 앉아 해결할 것이며, 잠자리에 들기 전까진 이 거실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영주의 집은 단출하다. 방 하나엔 침대와 옷장, 다른 방엔 벽을 두르는 책장, 부엌엔 1인용 냉장고, 거실엔 커다란 책상과 의자, 사이드 테이블, 조그마한 책장이 전부다. 지미가 2인용 소파라도 하나 들여놓으라고 해서 고민 중이긴 하지만 지금 이대로도 괜찮지 싶다. 공간이 있다고 해서 꼭 꽉 채워 넣을 필요 있을까. 텅 빈 느낌. 이런 느낌도 충분히 추구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영주네 집에도 넘치는 것이 하나 있긴 하다. 조명. 영주네 집 거실에는 조명이 세 개 있다. 하나는 베란다 창 옆에, 하나는 책상 옆에, 마지막 하나는 침실 문 옆에. 영주는 그게 무엇이든 조명을 받으면 다 은은하게 매력 있어진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책상에는 24인치 모니터와 서점에 있는 것과 똑같은 노트북이 놓여 있다. 집에 있을 때 영주는 주로 이 책상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오늘도 아침을 먹은 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인터넷을 뒤적이며 볼 만한 예능 프로그램을 찾았다. 몇 년씩 지속하는 예능은 보지 않는다. 단발성 프로그램들이 좋다. 이삼 개월 재미있게 보다 보면 끝나는 프로그램들. 즐겨 보던 프로그램이 끝이 나면 영주의 마음도 왠지 리셋되는 것 같다.


오늘처럼 마땅히 볼 프로그램을 찾지 못하면 봤던 걸 또 보기도 한다. 영주는 나영석 피디가 만든 프로그램은 다 좋아한다. 좋은 사람들이 좋은 풍경에서 좋은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라서 그렇다. 선하고 성실한 이야기를 보고 있다 보면 그냥 마음이 놓인다고나 할까. 그중 영주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꽃보다 청춘'.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편은 아프리카와 호주다. 영주에겐 모두 생소한 연예인들이었지만 그들의 젊음이, 환한 웃음이 보기만 해도 기분 좋게 했다.


그들을 보며 영주도 거쳐왔던 어떤 시간을, 분명 청춘이었던 것은 맞지만 실은 청춘이라 부르기 아쉬운 그 시간을 그리워할 수 있었다. 영주에게 청춘은 마치 유토피아 같은 것이다. 어디에도 없는 장소인 유토피아처럼 청춘도 어느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시간이지 않을까. 호주의 기적처럼 맑은 하늘 같은, 어느 젊고 예쁜 아이돌 그룹의 미소 같은, 하지만 그 아이돌 그룹에게도 딱 한 번 주어진 휴가 같은, 어쩌면 그 누구도 제대로 가져보지 못했던 그런 청춘의 시간. 영주는 청춘을 누려보지도 못했으면서 청춘을 그리워하는 자기 자신이 웃기기도 했다.  


영주는 이미 두 번이나 봤던 아프리카 편을 또 봤다. 눈을 압도하는 풍광에 다시금 놀라고, 그 광활하고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서로 웃고 의지하는 청춘들의 모습에 다시금 흐뭇해졌다. 만약 영주도 저곳에 갈 수 있다면, 그녀 역시 그들처럼 모래 언덕을 걸어 올라가 그 꼭대기에 걸터앉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앉아서 해가 뜨거나 지는 모습을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황홀할까, 아니면 외로울까. 어쩌면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다.

 

아프리카 편을 4회까지 보고 나서 창 밖을 보니 동네에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청춘을 그리워하는 횟수와는 비교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영주는 이 시간을 언제나 그리워한다. 어스름이 지는 저녁. 그 속을 걷는 것도, 그것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청춘처럼 어느새 금방 사라져 버리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매일 찾아오니 사라졌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영주는 곧 지나갈 이 순간을 더 잘 즐기기 위해 창가로 옮겨 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팔을 그 위에 걸치고는 창문 밖을 바라봤다. 서서히 겨울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하고 지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처음에 혼자 살게 됐을 땐 저녁 즈음이 되면 일부러 '아.'소리를 내보기도 했다. 방금 자기가 한 행동이 웃겨 웃음을 터트린 적도 여러 번이다. 이젠 하루정도 목을 쉬게 하는 거라 생각하며 말을 않고 지내는 것에 자연스럽게 대처하고 있다. 말을 하지 않으니 마음속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도 같다. 사실 말을 하지 않을 뿐 영주는 하루 종일 생각하고, 느낀다. 생각하고 느낀 걸 표현하고 싶을 땐 말을 하는 대신 글을 쓴다. 어느 일요일에는 이렇게 써 놓은 글이 세 개나 됐다. 어디에도 공개하지 않은 영주만의 글이다.

 

거실에도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영주는 의자에서 일어나 조명 세 개를 하나씩 켜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다시 일어나 사이드 테이블을 앞에다 가져다 놓고 책장에서 책 두 권을 뽑아왔다. 영주는 요즘 단편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와 <쇼코의 미소>를 밤마다 한 챕터씩 번갈아 읽고 있었다. 오늘은 <너무 한낮의 연애>를 먼저 시작할 차례다.


여섯 번째 소설의 제목은 <개를 기다리는 일>. 엄마가 산책을 하다가 개를 잃어버려서 외국에 나가 있던 딸이 귀국해 함께 개를 찾는다는 도입부다. 이어지는 가정폭력, 강간, 의심, 고백을 거쳐 '전망'에서 소설은 끝을 맺었다. 영주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나서 바로 앞 페이지로 돌아와 오늘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며 몇 문장을 읽었다.


“모든 전망은 아주 미미한 것들에서 시작하지. 결국 그것이 모든 것을 바꿀 거야. 이를테면 아침마다 네가 마시는 사과주스 같은 것.”


영주는 이런 소설을 좋아한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누군가가 어렴풋이 보이는 저 너머의 불빛에 의지하며 나아가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의지를 다지는 소설들. 순진한 희망, 섣부른 희망이 아닌 우리 삶에 남은 마지막 조건으로서의 희망을 말하는 소설들.


같은 문장을 입으로 한 번, 눈으로 몇 번 읽고 나서 영주는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 불을 켜고 냉장고에서 달걀 두 개를 꺼내 올리브 유를 친 프라이팬에 깼다. 밥은 국그릇에 반 정도 담았다. 그 위에 달걀 프라이 두 개를 얹고 간장을 한 숟가락 넣었다. 영주가 좋아하는 간장 달걀밥이다. 영주는 간장 달걀밥을 만들 땐 꼭 달걀을 두 개 깼다. 밥알 한 톨 한 톨 모두에 노른자가 스며들게 하려면 두 개가 필요했다.


부엌 불을 끄고 나서 숟가락으로 밥을 비비며 창문 쪽으로 걸어간 영주는 5분 전 그 모습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창 밖을 보며 밥을 먹던 영주는 그릇을 내려놓고 테이블에 있는 <쇼코의 미소>를 폈다. 입을 오물오물하며 목차를 확인했다. <쇼코의 미소> 역시 여섯 번째 소설을 읽을 차례였다. 소설의 제목은 <미카엘라>였다. 이 소설도 엄마와 딸이 주인공인듯하다. 영주는 소설의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그녀가 소설 끝부분에 이르러 펑펑 울게 되리란 걸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일요일 밤에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다가 잠에 들었다. 일요일을 뿌듯하게 보낸 밤에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 더 이런 날이 있었으면 했지만, 그래도 월요일 아침이 오면 하루를 급히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하다가 출근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딱 이 정도, 아니 여기에서 조금만 더 여유롭게 살 수 있다면, 하고 영주는 생각했다. 여기에서 조그만 더 자유로울 수 있다면, 영주는 이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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