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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Nov 04. 2019

#18 얼굴이 왜 그래?

소설 연재

민준은 쭈그리고 앉아 결점두를 고르며 로스터들과 띄엄띄엄 이야기를 나눴다. 의자에 앉아 편히 일을 하라는 로스터에게 "네."하고 대답했지만 그냥 그대로 앉아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사장님이 늦으시네요." 민준이 허공에 대고 말을 하자 한 로스터가 "몇 개월에 한 번씩 있는 일이에요."하고 대답을 해줬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민준이 묻자 이번엔 다른 로스터가 "우리야 모르지. 그냥 늦는다고만 연락 왔어." 하고 말하며 민준 옆에 의자를 갖다 놔줬다.


"아, 고맙습니다."

"무슨 일은 민준 씨한테 있는 거 아니야?" 의자를 갖다 준 로스터가 물었다.

"왜요?"

로스터가 거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혹시 요즘 거울 안 봐?"


민준이 피식 웃자 로스터도 따라 웃었다.


민준은 의자에 앉아 다시 찌그러졌거나 색이 탁한 생두를 찾기 시작했다. 쓰레기통에 버려질 생두들이었다. 쓸모없는 생두는 과감히 버려야 했다. 쓸모없는 생두가 하나라도 섞이는 순간 커피의 맛은 어딘지 아쉬운 맛, 부족한 맛이 된다. 원두 하나가 커피 맛 전체를 좌우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민준은 이렇게 생두를 골라 버리듯 버려야 할 생각들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 하나가 온 정신을 흐트러뜨려 놓을 수도 있으니까. 그는 마치 몸을 웅크린 듯 둥글게 말려 찌그러진 원두를 하나 집어 그 원두를 가만히 바라봤다. 할 수만 있다면 힘으로 웅크린 원두를 활짝 펴주고 싶었다. 힘을 줘봤다. 하지만 원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힘을 줘봤다. 그렇게 세 번째로 힘을 주고 있을 때, 지미가 들어왔다.


"어! 드디어 오셨네. 영영 안 올 줄 알았지."


민준은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지미를 보며 깜짝 놀랐다. 깜짝 놀라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다가 오히려 더 얼굴이 굳어지고 있는 걸 느꼈다. 그녀는 운 것 같았다. 부은 눈으로 눈웃음을 짓자 붓기가 더 두드러져 보였다.


"원두 가지러 왔어요.” 민준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말했다.


지미는 민준을 뒤에 두고 돌아다니며 진행 사항을 확인했다. 주문 수량을 하나씩 꼼꼼히 체크하고, 로스팅이 끝난 원두를 만져보고 냄새도 맡았다. 지미가 분쇄 원두를 확인하고 있는 로스터에게 다가가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거예요” 하고 말했다.


"얼마나 걸려?"

"10분이면 돼요."


지미가 오른손을 전화기 모양으로 만든 후 귀에 갖다 대며 '다 되면 연락해'라는 뜻을 전하자 로스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손가락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직접 가져다주겠다는 뜻이었다. 지미는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한 뒤 민준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앞서 걸어가던 지미가 로스팅 실에서 나오자마자 뒤로 돌더니 민준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아." 민준이 괜스레 손으로 뺨을 만졌다.

"눈이 푹 꺼졌어. 인생에 진 눈이야. 무슨 일 있어?"


지미가 묻자 이번엔 민준이 지미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사장님 눈 지금 장난 아니게 퉁퉁 부어 있는 거 알고 계세요?"


민준의 물음에 지미는 "아, 맞다!"하고 말하더니 손바닥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오는 내내 손으로 그렇게나 눌러댔는데, 바보같이 들어오면서 확인을 안 했네. 티 많이 나?"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쟤네도 알았을까?"


민준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젠 나도 정말 모르겠다. 암튼, 가자."


고트빈에는 웬만한 커피숍에 버금가는 커피 머신이 여러 대 있다. 원두의 맛을 체크해보기 위한 것들이다. 원두를 확인하러 오는 고객들에게 바로 여기서 커피 맛을 보게 한다. 가끔 영주처럼 커피를 내릴 줄도, 커피 맛을 볼 줄도 모르는 초보 카페 사장이 올 때도 있는데 그럴 땐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려주며 관계를 맺는다. 한 번 맺은 인연은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고트빈엔 오래된 고객이 많다.


바 형태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민준은 바깥쪽에 앉고 지미는 안 쪽에 섰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 번 웃음을 터트리고 나서는 둘 다 마음이 한결 풀렸다. 지미가 민준에게 물었다.


"일이 싫어졌어?"


민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그냥 방황 좀 했어요."

"방황?"

"영주 사장님이 그러던데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고."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래?"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온 말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아휴, 걘 그 잘난 척좀 그만해야 하는데. 애가 이쁘게만 안 놀았으면 정말 한 대 때려줬을 거야. "


두 사람은 같이 웃었다.


"그래서 노력하느라 방황했던 거라고?"

"대충 넘어갈라고 했는데, 그렇게 물으시면 안 되죠."


민준의 말에 지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대충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지."

"지금 사장님 마음도 그래요?"

"뭐가?"

"운 이유, 대충 넘어가고 싶으시냐고요."


그때 로스터가 분쇄한 원두를 밀폐 용지에 담아 가지고 왔다. 하나는 2kg이었고, 다른 하나는 250g이었다. 지미가 250g짜리 용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나머지 하나는 뭐야? 민준이 주라고?"


로스터가 지미를 향해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한 후 민준에게는 윙크를 하고 돌아가자 지미가 말했다.


"쟤, 입에 뭐 들어있었니? 왜 말을 안 해."

"사장님도 그러던데요." 민준이 손으로 전화 거는 시늉을 하자 지미가 "암튼, 뭘 마음대로 못 해. 말로 안 하고 손으로 시켰다고 지금 저러는 거지?" 하고 말하며 의자에서 휙 일어났다.


지미는 찬장에서 종이 필터와 드리퍼, 서버, 주전자를 꺼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커피 포트에 정수된 물을 넣고 끓기를 기다렸다가 다 끓고 나자 포트 뚜껑을 열고 잠시 기다렸다. 기다리는 사이에 드리퍼에 종이 필터를 끼우고 서버 위에 올리면서 지미가 말했다.


"오늘은 핸드 드립으로 내려볼게."


지미가 커피 포트에 있는 물을 주전자로 옮겼다.


"예전에 배웠던 거 기억나?"

"네."

"집에서 해본 적 있어?"

"자주 해요."

"그래? 좋다. 오늘도 저번 하고 같아. 나는 감으로 하는데 원래 정확하게 하려면 저울이랑 다 사용해야 하는 거는 알 테고. 알고 싶으면 물어보고."


지미는 원두를 넣지 않은 필터에 뜨거운 물을 부어 필터 전체를 적셨다. 곧바로 얇게 분쇄한 원두를 필터에 담았다. 지미는 주전자를 들어 원두 전체를 적셔주면서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확실히 핸드 드립으로 내리면 커피에서 더 깊은 맛이 나. 이상해. 기계가 더 정확할 텐데."


민준은 지미가 필터 중앙에서부터 서서히 원을 그리며 바깥쪽으로 물을 부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한 번 다 붓고는 잠시 기다렸다가 "이 봐, 이 거품"이라고 말하고는 다시 중앙에서부터 바깥쪽까지 물을 부었다. 민준은 커피 방울이 서버로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저는 언제 물을 그만 부어야 할지 매번 고민되더라고요."

"물 떨어지는 속도가 느려지면 그만 부으면 되는데, 쓴 맛이 좋으면 조금 더 부어도 되고."

"네, 그렇긴 한데, 최상의 맛이 정확히 어떤 맛인지 내가 과연 알 수 있을까 싶을 때가 있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그냥 감을 믿는 거지. 자주 내리고, 자주 마셔보는 수밖에 없어. 다른 사람이 내린 커피도 자꾸 마셔보고."

"네. "

"민준 씨 감을 믿어. 그 감 꽤 괜찮아."

"가끔은 사장님 말을 믿어도 되나 싶을 때도 있고요."


지미가 찬장에서 커피 잔을 꺼내면서 웃었다.


"인생 뭐 있겠어? 믿고 싶은 사람 말을 믿으면 되지."


지미가 커피를 따른 잔을 민준에게 건넸다. 자기 잔에도 커피를 따르며 말했다.


"이 커피를 마시면 나를 엄청 믿고 싶겠지."


두 사람은 커피 향을 음미하고 나서 첫 모금을 마셨다. 살짝 감겼던 두 사람의 눈이 떠지면서 마주쳤다. 민준이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정말 맛있어요!"하고 말했다. 지미는 당연한 말을 한다는 듯이 "그럼."이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커피를 홀짝이며 시간을 채우기 위해 하는 말, 오래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을 말들을 주고받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지미가 커피 잔을 보며 말했다.


"나도 정말 대충 넘어가고 싶어."


민준은 지미를 응시하며 그녀가 다음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대충 넘어가다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됐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게 잘 안 돼.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상황이 극적으로 느껴져."

"무슨 일 있으셨어요?"

"매번 똑같지. 그런데 이번엔 내 반응이 내가 보기에도 너무 폭발적이었어. 자칫하면 때릴 뻔했다니까." 지미가 웃음을 지으려다가 포기했다.

"가족이 뭘까 싶어. 가족이 뭐길래 왜 이렇게 내 감정을 내가 컨트롤 못하는 상황까지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민준 씨는 결혼할 거야?"


서른 살이 넘었지만, 민준은 한 번도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걸, 나도 과연 할 수 있을까, 정도의 생각만 스치듯 했을 뿐.


"모르겠어요."

"잘 생각해 보고 해."

"그래야죠."

"난 괜히 했어. 그 사람하고는 가족으로 묶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연인으로는 좋았어. 그냥 아는 사람으로도 괜찮았을 거야. 그런데 같이 사는 사람으론 아니야. 그런데 결혼하기 전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겠어."

"그렇죠."

"이 커피 식어도 맛이 괜찮지?"

"정말 그러네요."


잠시 침묵하다가 민준이 말했다.


"저희 부모님은 사이가 좋으셔서 한 번도 싸우신 적이 없어요. 제 앞에서만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와, 대단하다."

"어렸을 때는 그게 대단한 건지 몰랐는데 나이가 들면서 대단한 거라는 걸 알게 됐어요. 마치 우리 세 가족이 세 명이 치르는 팀 경기를 하듯 똘똘 뭉쳐 살았던 것 같아요."

"화목한 집안이네."

"그렇죠. 그런데..."

"그런데?"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요즘 들었어요. 가족이 너무 끈끈해도 좋지 않다,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두는 게 좋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는 중이에요. 아직 이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이 생각을 안고 살아가 보려고요."

"그 생각을 안고 살아가 본다고?"

"영주 사장님이 언젠가 그랬어요. 어떤 생각이 들었으면 우선은 그 생각을 안고 살아가 보라고요. 살다 보면 그 생각이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요. 미리 그 생각이 맞는지, 틀린 지 결정하지 말라고요. 맞는 말 같았어요. 그래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거예요. 뭐, 대단한 걸 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저, 거리를 좀 둬보려고요. 당분간은 부모님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요."

"부모님 문제는 늘 어렵지."


지미와 민준은 마지막 남은 커피를 마셨다. 민준은 차갑게 식은 커피가 왜 이렇게 맛있는 건지 잠시 생각했다. 따져볼 것도 없이 원두의 질이 좋으니까, 잘 추출했으니까, 라는 답이 나왔다. 지미가 두 사람의 커피잔을 테이블 옆으로 치우며 일어섰다. 


“얼른 가봐.” 


민준은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원두를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미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뒤로 돌아 몇 걸음 걷다가, 다시 지미 쪽으로 몸을 돌렸다. 테이블을 치우던 지미가 ‘왜?’하는 의미로 눈을 치켜올리자 민준이 말했다.


“이런 말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요. 사장님도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뭘?”

“가족에 대해서요. 한 번 가족이라고 해서 계속 가족일 필요는 없잖아요. 사장님이 가족과 함께할 때 불행하다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지미가 말없이 민준을 봤다. 지미는 지금 민준이 한 말이 마음에 들었다. 지미가 망설이고 망설이면서 스스로에게 하지 못하던 말을 민준이 용기를 내 해주고 있었다. 지미는 민준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했다. 민준은 오케이 표시를 보면서 고트빈을 나섰다. 살짝 괜한 말을 한 건가 싶었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라서 후회는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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