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언어학
안다는 착각
『지식의 착각』이라는 책은, 우리가 안다는 착각 속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 일깨웁니다. 자주 접하고 퍽 익숙해진 것들에 대해서도 그걸 누군가에게 착실하게 설명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제대로 된 한줌의 지식도 내게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공포마저 들게 합니다.
학문에서도 똑같습니다. 이 강의에서 다룰 내용도 아마 여러분이 중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과정에 이르면서 모두 한 번쯤은 들어본 내용일 겁니다. 그걸 대학의 전공이나 교양 수업에서 다시 접할 때 여러분은 ‘또 그 얘기. 아, 따분하고 재미없어!’ 그렇게 생각해 왔을 겁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귓등으로 수없이 반복해서 흘려들어야만 했던, 별 감흥도 주지 못했던 이야기들. 그러나 그것들은 1+1=2와 같이 너무도 당연하게 보이지만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첨단의 기술 개발에서 원석과 같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읽기란, 질문과 대답으로 해체하는 것
텍스트언어학의 주요 명제 가운데 하나는, 모든 텍스트는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의 글은 그것을 구성하는 질문과 대답으로 완전히 인수분해가 될 수 있습니다. 글을 읽는다는 건, 그 글을 구성하는 내용을 질문과 대답으로 재구성하는 걸 뜻합니다.
읽는 과정에서 애써 질문들을 찾아내고 그에 대한 대답들도 발굴해야 합니다. 질문과 대답이 짝하기도 하지만, 질문만 있고 대답은 없는 경우, 질문은 없는데 대답만 불쑥 나오는 경우도 있죠. 그렇게 질문과 대답으로 글을 해체하며 내용과 형식을 비판적으로 음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글을 읽어야 제대로 된 읽기입니다. 밑줄도 그으려 하지 않고, 긋는다 해도 정리하려 하지 않고, 정리한다 해도 무엇을 정리해야 하는지 갈피도 잡지 못한 채, 우리는 읽으면서도 읽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읽어도 남는 게 없고, 쉽게 읽는 만큼 쉽게 잊는 것입니다.
학습의 왕도: 사전 점검, 사후 정리
강의를 들으면서도 비슷한 악몽은 계속 됩니다. 사전에 아무런 준비 없이 그렇게 들어간 강의에서, 어렵지만 중요한 그런 내용들을 무미건조한 교수의 설명만으로, 동료 학생들의 어설픈 ppt 발표만으로 이해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계속하다가 끝내 졸업을 맞이하게 됩니다.
제대로 강의를 들으려면, 다루어질 범위를 미리 읽고 그중에서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어려운 것과 쉬운 것, 이해될 만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별해 놓아야 합니다. 그런 준비는, 수업 시간에 내가 무엇에 집중하고 무엇에 소홀해질 것인가를 알게 해 줍니다.
그렇게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잘 알지 못했던 것, 그동안 긴가민가했던 것, 알쏭달쏭했던 것을 이제 내 지식으로 만들고, 그걸 잊지 않기 위해 반드시 수업 후 간단하게라도 정리를 해야 합니다. 책을 읽을 때나 강의를 듣고 난 후에나 정리가 없으면 모두 쉽게 잊히고 맙니다.
대답할 수는 없어도 질문할 수는 있다
우리는 대답하는 데 익숙합니다. 무언가 대답은 할 수 있어도 질문은 하기 힘들어합니다. 준비한 게 없으니 꺼내 놓을 것도 없겠죠. 그런데 그보다도 모든 질문에는 반드시 대답이 뒤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립니다. 대답이 있는 질문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선생님들은 질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학생이 하는 질문에는 전문가라도 대답하기 힘든 것들이 매우 많습니다. 학생들의 질문을 원천봉쇄하는 건 생각보다 쉽습니다. 강의를 매우 어렵게 하면 됩니다. 존경을 받을지언정 무시는 당하지 않게 됩니다. 매우 안전합니다.
대답이 질문을 이끌어선 안 됩니다. 그런 걸,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하죠. 질문이 대답을 이끄는 것입니다. 질문이 먼저 주어지고 난 다음에야 대답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대답이 궁색해도 질문은 할 수 있습니다. 질문이 있어야 대답을 찾게 되고, 그래야 새로운 게 보입니다.
기초부터 최초까지
이 강의는 매우 기초적인 지식에서 출발하여 가장 최근의 이슈까지 다루게 됩니다. 그동안 별 감흥 없이 지루하게 들어 왔던 기초적인 지식에서 출발하여, 테슬라를 이끄는 일론 머스크와 페이스북의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가 실현하려는 인류 최초의 기술까지 여행합니다.
언어와 기호, 음성과 언어, 자의성과 필연성이라는 따분하고 지루하고 상투적인 개념들이 질문과 대답을 통해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질문과 대답을 통해 그동안 접해 왔던 경계를 넘어 도저한 깊이로 천착해 들어가 실존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총 298개의 질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번 첫 시즌에서 다룰 것은 그중 약 4%에 해당하는 12개의 질문이죠. 이것은 실제 이루어진 수업을 바탕으로 합니다. 2016년부터 언어학의 이해 혹은 한국어학 개론이라는 이름으로 학부와 대학원에 개설된 실제 수업을 바탕으로 합니다.
교학상장의 기쁨
강의가 이루어지는 동안 교수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학생은 끊임없이 대답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입장이 바뀌어 학생이 질문을 하고 교수는 그에 대해 답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교수가 학생을, 학생이 교수를 궁지에 몰아넣는 게 아니라 함께 모색하며 나아갑니다.
실제 수업에서도 3단계를 거칩니다. 수업 전 핵심 문제를 배포하여 학생들 개개인이 미리 문제를 풀어 옵니다. 교재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며 예습을 합니다. 3시간의 강의 중 첫 1시간은 조별 토의, 나머지 2시간은 교수-학생 간 일대일 질의응답이 이루어집니다.
조별 토의를 통해 학생 개개인이 준비한 답들을 맞추어 보며 조율합니다. 그 과정에서 생각들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폭발하기도 합니다. 학생들은 본인이 하는 말들이 최근 학계의 가장 뜨거운 화두인 줄도 모르고 수줍게 이야기합니다. 그걸 나는 옆에서 놀라움으로 듣습니다.
교수-학생 간 일대일 질의응답을 통해 개개인이 예습해 온 내용, 조별 토의를 통해 가다듬어진 내용이 다시 한 번 점검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표면에 나와 있는 지식의 이면에 들어 있는 진짜 지식이 고개를 들고 올라오게 됩니다. 이론이 실제로 변모하는 순간입니다.
질의응답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야기는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힘듭니다. 학생이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게 되면, 그때부터 질문이 하고 싶어지게 됩니다. 교수가 먼저 질문함으로써 방아쇠를 당기면 연쇄반응이 이루어집니다. 교수가 질문하고 학생이 답변하다가 역전이 됩니다.
그러한 질문과 대답을 통해 학생은 지식을 마음껏 빨아들이고 교수는 지식을 마음껏 토해 냅니다. 오직 논리가 이끄는 대로 나아가며 교수와 학생은 교수와 학생을 벗어나 대화하는 사람들도 거듭납니다. 거기엔 오로지 앎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들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강의 설계도
첫 시즌에서 다루어질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연구의 절차: 언어를 위해 먼저 기호를
2. 오감 사용 설명서: 기호의 형식
3. 두 손이 마주쳐야 기호
4. 기호의 조건: 파란불, 빨간불
5. 매캐하고 거무스름한 기호
6. 이분법의 마술: 하나는 둘, 둘은 넷!
7. 기호 + 소크라테스 = 언어
8. 형식으로 언어 나누기: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지위
9. 음성과 의미 사이: 언어의 자의성
10. 의성어의 비밀: 필연성과 자의성의 기로에서
11. 기호의 자의성과 필연성
12. 언어에서 자의성 제거하기
13. 필연성을 가진 언어: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
언어학의 연구 대상인 언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기호에 대한 접근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호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형식과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기호가 형식과 내용을 가진 것임을 알게 되면, 그걸 바탕으로 삼단논법을 통해 언어를 정의할 수 있게 됩니다. 언어를 구성하는 음성과 의미의 관계는 곧 자의성으로 규정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신호등과 연기를 통해 기호의 두 가지 종류를 알게 되고, 음성언어가 문자언어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확인하며, 의성어가 자의성을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임을 깨닫게 되고, 이분법이 언어학의 정의에서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언어의 자의성이 의사소통에 끼치는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드디어 인류가 최근 시도하고 있는 첨단 프로젝트의 빛과 어둠을 함께 고민해 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앞에서 이야기한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질 것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여러분을, 질문하는 언어학 강의에, 기쁜 마음으로,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