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순무 님이 새로 들어왔다. 순무 님은 얼굴이 불긋불긋하고 우리 반에서 몸집이 가장 크다. 가장 느린 하늘 님보다 더 느려서 맨 끝자리를 차지했다. 우리 레인 순번은 머루-당근-딸기-냉이-나-매실-하늘-순무 순이 되었다.
머루 님: 에이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말씨나 표정이 시원시원함.
당근 님: 반장. 온화한 인상에 나긋나긋한 말투.
딸기 님: 눈이 크고 귀여운 외모.
냉이 님: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언뜻 무뚝뚝해 보이지만 자상함.
매실 님: (지금은 쉬고 있는) 살구 님과 동갑으로 최고령. 제자리에서 뛰는 운동을 할 때가 많고 개그 욕심이 있음.
하늘 님: 순무 님이 오기 전까지 가장 느렸음. 지긋이 미소 지으며 조곤조곤 말을 걺.
순무 님: 몸집이 크고 인상이 푸근하며 가장 느림.
순무 님은 한두 바퀴만 돌아도 힘에 부친 듯 넋 나간 얼굴이 되었으며, 모퉁이에서 자주 쉬었다. 그동안 깍두기 같은 존재-느려서 뒷사람과 속도가 안 맞으므로 눈치껏 간격을 두거나 추월하는 식으로 맞추어야 했던-는 하늘 님뿐이었는데, 순무 님까지 둘로 늘어났다. 순무 님은 첫날, 중도에 두어 번 멈추어서 천천히 벽을 짚고 걸었다. 당황한 나는 허우적대다 순무 님을 겨우 지나쳤는데, 이번에는 하늘 님의 작은 발이 보이고……. 이런 식으로 몇 번을 멈칫거리고는 했다.
아무리 우리 레인이 가장 느리고 태평한, 어쩌면 세상에 없을 ‘노인을 위한 레인’이라고는 해도,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하늘 님까지는 어찌어찌 안고 가지만 순무 님까지는 좀……, 그렇지 않을까. 순무 님 자신을 위해서라도 자유수영이나 아쿠아로빅 같은 게 더 낫지 않을까. 계속 이런 상태라면 선생님에게 말을 해봐야 할까. 아무리 내가 실력 향상의 의지가 약하다지만, 자꾸 ‘깍두기 님’들이 는다면 다른 레인으로 옮기는 걸 고려해야 할까. 순무 님의 합류가 신경 쓰이면서 나는 어울리지 않게 효율, 능력, 수준, 발전 같은 단어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순무 님으로 인해 생각이 많아지던 어느 날, ‘걸어가기’ 시간에 순무 님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배운 지 오래되셨어요?”
회원님들에게 으레 하던 질문을, 나는 순무 님에게도 건넸다. 순무 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전전해 온 여러 수영장 이야기를 열심히 들려주었다. 나도 순무 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띄엄띄엄이지만 20여 년을 넘게 배웠고 당연히 ‘좀 할 줄 알던’ 시기도 있었다. 지금은 몸에 어떤 불편함이 있는지, 정확한 연배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순무 님은 수영을 좋아하고(아쿠아로빅보다 운동이 되니 더 낫다고) 계속하고 싶다는 의지가 분명해 보였다.
수영을 마치고 순무 님은 철제 사다리를 잡으며 말했다.
“나 좀 밀어 줘요.”
아아. 언젠가 다른 회원님이 순무 님을 도와주던 장면이 스쳐 갔다. 나는 순무 님의 양 허벅지께를 받치고 힘껏 밀어 드렸다.
“아이고, 고마워요.”
순무 님은 무사히 사다리를 올랐고, 우리는 환하게 미소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