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을 가리는 편인데, 누군가와 이른바 케미가 감지돼야 마음껏 떠들고 까부는 유형이다. 나와 맞는 친구들은 주류에서 살짝 비켜난 듯한 부류로, 사회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있거나 돈 안 되는 일만 도모하거나 소설을 읽거나 글을 쓰(고 싶어하)거나 인기 없는 영화를 좋아하거나 특이한 취미가 있거나 대안교육, 대체의학, 신비주의, 비효율, 잉여력, 게으름, 음습…… 등의 특징을 지녔다. 현실 감각이 달리고 재미를 추구하는 나는 그런 친구들과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더러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멀쩡해(?) 보이는 이도 있지만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발랄하고 표정이 풍부하고 웃기는 사람일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이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 (다행이다.)
낯선 자리에 가면 일단 경계를 짓고 분위기를 살핀 뒤 서서히 허문다. (물론 허물지/허물리지 않을 때도 많다.) 기껏 익숙해진 곳에 낯선 이가 끼어들면 거북하고, 어느 친숙한 무리에 내가 끼어야 하는 상황은 더욱 난감하다. 처음 ‘얕은 풀’(초~중급)에서 ‘깊은 풀’(상급 또는 연수반)로 올라갈 때, 그 점이 신경 쓰였다. 어느 정도 연배가 되면 더는 늘지 않고 는다 한들 올라갈 곳도 없어서, 십 년이고 2십 년이고 한 자리에 붙박인다. ‘할머니들의 텃세’는 우리 수영장에도 무성한 소문으로 떠돌았다.
상급반 첫날(벌써 7개월 전의 일이다), 백합 님과 나, 둘이서 ‘가장 느린 레인’인 맨 왼쪽에 배정되었다. 살구 님 정도를 빼면 딱히 우리를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왜 우리 레인에만 사람들이 많으냐”는 투정도 들렸다. 나이가 들수록 익숙한 패턴이 틀어지는 건 스트레스라서 ‘텃세’라는 태도로 나타나는 거라고 이해해 본다(우리 반 회원님들은 텃세가 없는 편이었다).
나는 그저 깊은 풀과 오리발에 적응하고자 성실하게 출석했고(점점 깊은 풀과 오리발이 좋아졌다), 회원님들한테 열심히 인사를 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우리 반’에 안착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말수는 적다고 해도, 그때와 지금의 공기는 다르다.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지금은 꽤 편하고, 눈짓과 손짓으로 격려를 주고받는다.
그렇다고는 해도 연배가 한참 위인 이들과 어울리는 건 여전히 어렵다. 친밀감의 문법이 다르다고 할까. 자연스러운 타이밍에 맞춤한 화제로 스스럼 없이 쑥, 끼어드는 능력. 일시에 경계를 허무는 기술. 그런 넉살이 없다. 우리 레인에는 또래가 없다 보니(백합 님은 얕은 풀로 돌아갔고, 나머지 분들은 거의 70대) 나는 세상 얌전한 사람으로 처신한다. 다정하게 챙겨 주던 살구 님마저 없으니 나는 더더욱 조용해졌다. 살구 님은 허리 협착증으로 두 달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살구 님으로 인해 빚어지던 엉뚱하고 실없는 분위기가 종종 그립다.
회원님들끼리는 무람없이 “형님”, “박여사” 등으로 부르며, 허리가 더 안 좋아졌다는 둥 어느 한의원이 좋다는 둥 아들네가 와서 밥을 먹었다는 둥 손주가 어떻다는 둥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나는 한쪽에서 조용히 들으며 미소를 지을 뿐이다. 내 성격상 이 정도의 거리감이 편하기는 하다. 수영장에서는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덜 어색하고. 공간 자체가 웅웅 울리는데다 가만히 있기보다는 ‘도는’ 시간이 많고, 짬짬이 쉴 때도 숨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다. 무엇보다 수영은 ‘고립’의 운동이니까.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 다른 데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이 격렬한 고립의 시간이 좋은 것.
하지만 수영 이야기를 쓰려다 보니, 회원님들을 더 알고 싶어진다. 에이스 머루 님은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잘했을까. 반장인 당근 님은 말투가 나긋나긋한데 혹시 가르치는 직업이었을까. 딸기 님은 눈이 크고 표정이 귀여운데 젊은 시절엔 어땠을까. 가장 느린 하늘 님의 전성기는? 가령 넉살이 좋다면- “언니, 왜 지난주에 안 오셨어요?” “어머, 수영복 바꾸셨네. 잘 어울린다아!”-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며 ‘언니’들을 즐겁게 해줄 뿐 아니라 서로를 잘 알아갈 텐데. 아무래도 이번 생에는 무리겠지.
옆 레인 회원님들은 넷으로 우리 레인보다 월등히 빠르다. 우리 레인 회원님들은 비교적 자분자분한 데 반해 옆 레인 꽈리 님은 목소리가 크고 성격이 호탕하다.
“야, 왜 늦게 왔냐?”
얼마 전, 꽈리 님이 싱글거리며 다짜고짜 물었다. 오며 가며 얼굴은 익혔지만 말을 걸어 준 건 처음이다. 다짜고짜 반말을 하지만 기분이 하나도 안 나쁘다.
“아…… 네. 뭐 좀 하다 보니……. 헤헤.”
나도 덩달아 싱글싱글 웃게 된다.
“이름이 뭐예요?”
옆 레인 달래 님과도 얼마 전에 대화를 처음 나누었다. 달래 님은 늘 환하게 웃고 상냥함이 몸에 밴 듯한 분이다. 약간 코맹맹이 목소리에 울림도 좋다.
“그루비(가명)예요. 루! 비!”
수영장에서 질문을 받아 큰소리로 말해야 했다.
“아아. 루비. 루비 씨이!”
달래 님은 그 뒤로 나와 마주칠 때마다 내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며 알은체를 했다. 킥판을 잡고 돌다가도, 샤워실에서 몸을 씻다가도, 탈의실에서 머리를 말리다가도……. 어찌나 낭랑하게 부르는지 불릴 때마다 부끄러웠다. 그러고 보니 달래 님의 성함을 모른다는 데 뒤늦게 생각이 미쳤고, 머뭇머뭇 성함을 물었다. 달래 님은 성함을 말해 주었지만 00 씨라고도, 00 님이라고도 부를 수 없었다. 넉살이 좋다면 “00 언니~!”라고 부르며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도 있겠지만……, 이번 생에는 역시 무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