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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 수 있는 이유

사람은 사람으로 치유받는 존재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받는다.


모든 희망이 꺾인 후, 가장 걱정되는 것은 와이프에게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속이면 안 되기에 속일 수도 없기에 큰 용기를 내기로 했다. 금융사기를 당한 후, 용기 낼 일이 참 많아진 것 같다.


어쩌면 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내야만 하는 상황이 나를 더욱 성장하게 만드는 게 아닐는지...




아이들이 잠든 늦은 밤, 캔맥주를 옆에 두고 와이프와 마주 앉았다. 심호흡도 여러 번하고 시뮬레이션도 여러 번 돌려보았지만, 입술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달싹달싹 거리는 입술에 힘을 주어 얘기를 시작했다.


"사실, 금융사기를 당해서 자기 신용대출하고 정기예금 그리고 보험약관대출을 다 날렸어. 정말 미안해. 얼굴 볼 면목이 없어."


"이미, 다 알고 있었어. 15년을 함께 살았는데, 자기 말과 행동을 보면, 이제 다 알 수 있어."


"그런데  왜 그동안 한 번도 잔소리도 안 하고 물어보지 않았어?"


"자기가 왜 투자를 시작했는지 알고 있었고, 자기가 준비되면, 얘기해 줄거라 믿고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그 순간, 바보 같은 나를 믿고 기다려 준 와이프에 대한 감동과 감사함의 물결이 내 마음을 뒤덮었다. 내가 금융투자사기로 받은 마음의 깊은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나를 아직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기에, 다시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대출은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너무 걱정 마. 아직 시간도 있고, 대출연장을 하면 되니까. 힘내."


와이프의 진심 어린 위로에 이 여자라면 내 목숨도 바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에 대해 아무 판단도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믿고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닐까.


진짜 오랜만에 두 발 뻗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나는 5년 전부터 새온독이라는 새벽 온라인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평일 새벽마다 줌으로 만나서 독서를 하고 각자 스피치를 하는 시간을 갖는다.


독서모임을 함께 하는 선배님들과는 어느새 각자 삶의 막을 뚫고 연결되어 있는 관계가 되어있었다. 가족에게도 말하기 힘든 내밀한 삶의 희로애락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금융투자사기를 당하고 아무 삶의 의욕이 없을 때에도 새온독과는 연결되어 있었다. 아니, 연결하고 싶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가 생존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새온독은 추락하고 있는 나의 삶의 날개가 되어주었다.


함께 독서를 하고, 생각을 나누다 보면, 가슴에 깊게 박혀 있는 금융사기라는 화살의 아픔을 잊을 수 있었고, 잘하면 뽑을 수도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금융사기로 인한 상처를 사랑하는 사람들 덕분에 서서히 치유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30년 지기 절친이 2명이 있다. 비정기적으로 우리는 모여서 서로 살아가는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풀어놓고는 한다.


금융투자사기로 삶의 의욕이 없을 때, 친구들과의 만남을 미루고 회피했다. 어느 날 갑자기 두 친구가 어스름한 저녁에 집으로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당황함보다는 반가움이 먼저 앞섰다. 우리는 조용한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고, 한 잔, 두 잔 적시기 시작했다.


상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요즘, 너 아주 많이 이상하다. 무슨 일 있지. 얘기 좀 해봐."


나는 와이프와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치유가 된 상태였다. 그래도 입이 잘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술기운을 빌려 어렵게 얘기를 시작했다.


"사실, 얼마 전에 금융사기를 당했어. 그동안 모은 돈이랑 대출받은 거 다 날렸어."


친구들의 얼굴은 금세 검은색으로 어두워졌다.


마치, 본인들이 금융사기를 당한 듯한 표정과 초점 잃은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30년 절친이라서 그런지, 말보다는 마음으로

모든 감정이 느껴졌다.


우리는 조용하게 마음의 대화를 시끄럽게 나누고 헤어졌다.


다음 날, 핸드폰의 알림음이 울렸다.


"500만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거의 동시에 톡이 왔다.


"힘내라. 학주야."




그렇게 나는 다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


끌어당기는 중력에 의해 떨어지고 있던 나를 밀어내는 중력으로 다시 일으켜 세워 준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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