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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May 12. 2021

누군가에게는 우리 부부가 연구 대상일 수도 있겠네요

마흔여덟 번째 잊지 못할 또 하루를 기록하며

 "부장님 부부는 연구대상이야. 아니 오죽하면 내가 그 집에 남편 교육을 보내고 싶겠어"



거실 시계의 시침은 어느덧 자정을 넘어섰고, TV를 보느라 평소보다 늦은 시간임에도 우리 가족 모두는 아직 거실에 모여있었다. 오늘은 독서실에서 일찍(?) 돌아온 아들 덕에 아내도 자정을 조금 넘어선 시간에 잠을 청할 수 있게 됐다고 방기는 눈치다. 잠을 청하려고 TV를 끄려는 순간 방에 들어갔던 딸아이가 다시 거실로 나오며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자정 넘었으니까 아빠 생일인데 왜 다들 축하한다고 안 해줘. 너무들 하시네. 아빠 생일 축하해요!"

 "아, 맞네. 자정 넘었으니까 철수 씨 생일이네. 미안, 생일 축하해요"

 "아빠, 나도 생일 축하해"


조금 갑작스러웠지만 딸아이 덕에 엎드려서 절 받은 느낌으로 생일 축하 메시지를 잠이 들기 5분 전에 받았다. 잠자리에 누워서 딸 낳아 키우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을 청했다.  


생일날 아침, 아들의 고등학교 마지막 중간고사로 미역국 대신 된장찌개가 식탁 위에 올라왔다. 특별히 서운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빠진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생일날 아침임에도 출근하는 내게 아내는 평소와 같은 다녀오라는 인사 이외에는 별 말이 없었다. 크게 개의치는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생일인데 말 한마디 건네주지 않는 아내에게 조금 서운한 마음은 출근하는 내 발걸음을 무겁게 다.


사무실에 도착해 평소같이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냉장고에 넣기 위해 가방에서 도시락 가방을 꺼냈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져 싸 온 반찬이 상할까 봐 난 출근하자마자 도시락을 냉장고에 넣는다. 도시락 가방을 열었고, 밥통을 빼다가 가방 안쪽에 세워진 편지 봉투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아내가 쓴 생일 기념 손 편지


이내 아침 내 마음을 얼렸던 서운함도 봄 눈 녹듯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편지를 펴고, 아내가 직접 색연필로 그린 라일락과 꾹 눌러쓴 손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좋아진 기분 때문인지 자리를 붙이고 앉았던 엉덩이와 어깨가 들썩대며 나도 모르게 흔들흔들 댔다. 하지만 나이 먹고 가볍게 어깨춤이나 추는 모습을 누가 볼까 서둘러 멈췄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동료에게 들켜 버렸다. 자주 가족 얘기를 하던 사이여서 들긴 김에 자랑하고 싶은 내 아내의 손 편지를 아주 살짝 보여주게 됐다.


 "아이, 김 부장님 뭐예요. 중년 부부가 신혼처럼 이렇게 달달하면 안 되지"

 "아내가 생일이라 손 편지를 써줬네요. 난 아들 시험도 있고 해서 기대도 안 했는데 기분 좋네요"

 "와, 이거 언니가 직접 그린 거예요? 너무 좋겠다. 아니 결혼한 지 20년 다 되지 않았어요. 이러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렇게 사는 게 습관이 돼서 다들 이렇게 사는 줄 알았죠"

 "암튼 부장님 부부는 연구대상이야. 아니 오죽하면 내가 그 집에 남편 교육을 보내고 싶겠어"


회사 다니며 아내와 금실이 좋다는 이야기는 동료들에게 자주 들었다. 그래서인지 오늘 동료에게 듣는 이 말도 낯설지가 않았다. 지금은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예전 동료는 우리 부부를 보며 늘 '선배님 부부처럼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었다. 난 그 후배의 말이 늘 듣기 좋았다. 후배는 내가 일부러 티를 내지는 않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내 행동과 말에서 가족에 대한 내 배려가 몸에 배어 있어서 티 내지 않아도 안다고 늘 타박이었다. 바로 부러움에 타박.


오늘도 함께 일하는 동료가 보내는 부러움의 눈총과 경외감을 느낄만한 말들을 들었다. 동료는 부부간에 사이가 좋으려면 서로 잘해야 한다지만 자신이 곁에서 본 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다른 남자와도 많이 다른 부류는 분명하다고 했다. 과거 결혼한 여자 동료들과도 가끔씩 내 얘기가 나올 때면 자신들의 남편들과 비교해 본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날 분명한 '연구 대상' 중 하나라고 종종 얘기했었다고 했다.


결혼 20년 차 내 주변에도 흔하지 않은 커플임을 나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난 내 아내이기 때문에 지금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늘 한결같을 수는 없겠지만 아내나 나나 지금 마음을 꾸준히 유지하게끔 오늘도 서로를 배려하고 아껴주는 법을 배운다.


조금은 아무렇지 않은 날, 그냥 평범한 하루로 지나갈뻔했던 오늘이었다. 하지만 아내 덕분에 오늘도 잊지 못할 내 추억의 한 페이지 남겼다. 아내의 카드 속에 있는 예쁜 보랏빛 라일락 꽃처럼 난 아내에게, 아내는 내게 잊히지 않는 진한 향기를 매년 남겨주고 있다.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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