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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Apr 24. 2023

퇴사 사유 업무를 이직 후에도 하게 됐어요

새로운 숙련자의 탄생은 서툰 시작부터다.

 

 "다행스럽게도 어려움은 있었지만 이번에도 인증이 나왔네요"


4년 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새로운 보직을 받았다. 처음 하는 업무라 너무도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날을 엔지니어, 컨설턴트로만 일하던 내게는 너무도 생소한 일이었다. 국가 정보보호제품 보안인증이 바로 그것이었다. 보안제품을 제조, 판매하는 회사이고, 공공기관에 납품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인증이다. 원치는 않았지만 회사일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거절하면 떠날 수밖에 없는 게 회사니까. 그렇게 18년을 해오던 보직을 내려놓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신청 제품 자체가 국가정보원이 필요성을 인정하는 보호제품으로 심사 기준도 엄격하고, 유연성도 없다. 인증 심사 중 사소한 이슈도 허락되지 않을 만큼 인증 통과가 어렵다. 각 심사 과정마다 까다로운 규정과 원칙에 대응하느라 멘털 붕괴는 예삿일이었다. 정작 더 힘들었던 건 수개월 동안 인증 승인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회사의 시선이었다, 시간 단위로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고, 평범한 하루가 올까 싶었다.


우역곡절이 많았지만 두 번째 인증 업무를 마쳤다. 진행 중 퇴사 결심도 여러 번이었지만 현실을 생각하며 꾹 참고 하루하루를 이겨냈다. 그렇게 하루를, 한 달을, 수개월을 지냈더니 결국 '피니쉬' 라인에 도착했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끝내고 나니 앞으로 2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에 조금은 편안해졌다.


 하지만 그런 편안한 마음도 한, 두 달을 못 갔다. 다녔던 회사에는 인증 제품군이 하나가 아녔다.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인증 준비를 시작했다. 평가할 제품에 대한 문서를 준비하고, 평가할 기관을 만나서 미팅하고. 그렇게 다시 시작한 인증은 결국 이직을 결정하게 된 결과를 가져왔다.


 신입사원의 마음은 아니었다. 무조건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관련 업무를 해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회사의 시선이 다름을 알았다. 회사에서 본 나에 대한 기대감은 20년 경력과 높은 급여였다. 새로운 업무여서 생긴 어려움은 내가 이겨내야 할 몫이었다. 20년 경력을 모두 인정한 급여의 가치는 열심히가 아닌 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당연하지만 낯선 업무에 대한 빠른 적응과 숙련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의무였다. 20년 경력이면 즉시 새로운 업무 숙련자가 되긴 어려워도 회사에서 주는 눈치야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는 연차다. 그렇게 난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니 적응하기 싫어서 다니던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회사를 이직한 이유가 인증 업무에 대한 부적응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그 부담감과 두려움이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건 사실이다.


새 직장에서 새로운 일을 받아 들다.


많은 직장인들은 동종업계 혹은 유사업계로 이직한다. 나도 큰 틀에서는 유사업계로의 이직이었다. 하지만 면밀히 따져보면 IT라는 직군에서는 유사하지만 과거해 오던 일과는 차이가 컸다. 하고 싶었던 분야의 일이라 큰 고민 없이 이직했지만 막상 입사하고 나니 걱정이 앞섰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입사하고 받아 든 첫 난제는 제안서 작성 업무였다. 기술 컨설팅을 많이 했던 내게 문서만 따져보면 낯설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 까다롭다던 인증 업무를 할 때는 적게는 수십 페이지부터 많게는 백 페이지가 넘는 문서를 쓴 적도 있다. 하지만 제안서 작업은 조금 달랐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문서 안에 단순히 제품이 아닌 회사 전체 노하우를 녹여 넣어야 했다. 그냥 쓰는 것도 어려운데 예쁘게 포장도 해야 하니 감각까지 있어야 하는 어려운 업무 영역이었다.


그래도 과거 많이 써오던 기술문서와 손절한 인증 업무 때 문서 스킬이 도움이 됐다. 게다가 난 명세기 브런치 작가였다. 글 쓰기 재능을 유감없이 녹여 넣은 제안서와 문서들이 시간이 지나며 차곡차곡 쌓여갔다. 회사 소개서부터 제품 카탈로그 그리고 다양한 내외부문서까지. 난 수개월 사이에 새로운 업무에 충분히 잘 적응해 있었다.


요즘은 또 다른 종류의 업무를 맡았다. 바로 손절했던 인증 업무다. 과거와는 종류가 다르지만 당연히 평가를 위한 문서부터 외부시험 그리고 발표까지 흐름은 유사했다. 익숙함이 무서워진다는 의미를 알겠다. 시간이 지나니 과거했던 인증 업무보다는 수월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과거 퇴사를 결심할 정도로 거부했던 업무를 난 새롭게 받아 들었다.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을 여러 종류의 인증 업무를 진행했고, 또 진행 중이다.


세상을 바꾸기는 어려워도 나를 바꾸는 건 조금은 쉽지 않을까


베테랑!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여 기술이 뛰어나거나 노련한 사람을 의미한다. 결국 오랜 시간 경험을 쌓아온 일 잘하는 사람이다. 모든 분야 베테랑들도 그 시작이 있었을 것이다. 경험이 쌓이는 오랜 기간은 시간이 해결할 일이다. 모든 일을 처음부터 능수능란하게 할 수는 없다. 서툰 시작 후에 실수가 반복되고, 스킬을 익혀가며 시간이 지나면 숙련자가 탄생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툴더라도 시작하려는 마음이고, 두려움을 이겨내고 인내하는 과정이다.


처음 맡았던 일을 은퇴할 때까지 꾸준히 할 수 있다면 그 일은 천직일 것이다. 보통 이렇게 오랜 시간 숙련된 일을 하는 사람을 '장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최근에는 한 우물만 파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이유는 주변 환경의 영향이나 빠른 시대의 흐름, 트렌드의 변화 등에 따라 직군, 직종이 사라지기도 생겨나기도 한다.


항상 모든 상황이나 환경에 맞춰 준비하고 있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게 정답은 아니다. 오랜 기간 하던 방식을 고수하고, 하던 업무를 고집하도록 시대가 두질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혁명가'가 아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변하는 세상을 탓하긴 백세 시대라는 말로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다. 늘 도전의 마음으로 새로운 업무의 숙련자가 되기 위해 서툰 시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과정에서 실수도, 실패도 결국 성과의 발판이 될 것임을 알기에 오늘도 많은 사람이 경험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두려움을 이기고, 부담을 떨쳐내는 건 결국 큰 용기와 조금의 시간이다.


※이미지 출처 : KBS2 TV ‘직장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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