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목록과 몇 가지 기록들
2020년 올해 극장에서 만날 수 있어서 특별히 감사하고 소중했던 다섯 편의 영화들을 기록해둔다.
기술이 이야기와 어떻게 만나는지 돌아보게 했던 작품. 샘 멘데스와 로저 디킨스의 협업은 단지 기술적 과시에만 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작품을 만날 때의 경험은 극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감독 자신의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겨냈다는 측면에서는 한편으로 최근 자신의 아버지가 쓴 각본을 바탕으로 <맹크>(2020)를 연출한 데이빗 핀처가 잠시 떠오르기도 한다.
*<1917> 관련 기록:
[그 대단치 않은 삶들이 우리에게 이야기가 되는 이유](2월 20일): (링크)
<캐롤>을 많이 생각하게 하는 영화로도 다가왔었다.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는 <아워 바디>를 보면서 이 영화를 한편으로 다시 생각하기도 했다. 이것 외에 셀린 시아마 감독의 전작 세 편이 올해 극장 개봉을 하기도 했으니, 그런 의미에서도 2020년은 기억해둘 만한 해로 남을 듯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관련 기록:
(긴 리뷰는 모두 이메일 연재 [1인분 영화]를 통해 구독자에게만 공개했다.)
인스타그램 단평(1월 21일): (링크)
[1인분 영화] 글 '당신의 시선'(상) 발췌(11월 23일): (링크)
내게는 <스타 이즈 본>(2018)과 마찬가지로 좋은 이야기, 좋은 리메이크에 대해 생각하게 했던 모범례다. 감독 그레타 거윅의 연출력을 <레이디 버드>(2017)에 이어 또 한 번 입증해낸 작품이기도 하고. 언젠가 그레타 거윅과 시얼샤 로넌의 협업을 루이자 메이 올컷 소설 원작으로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작은 아씨들> 관련 기록: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마찬가지로, 긴 리뷰는 모두 이메일 연재 [1인분 영화]를 통해 구독자에게만 공개했다. 원작자 루이자 메이 올컷 평전과 소설 『조의 아이들』을 다룬 서평으로 그 기록을 대신한다.)
[이 세상에는 죽지 않는 이야기가 정말 있다]: (링크)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이니 당연하겠지만) 올해 이 작품만큼 '시네마'에 대해 생각하게 했던 경우가 또 얼마나 있을까. <테넷>은 대부분의 대작들이 개봉을 연기하는 동안에도 한동안 7월 개봉을 고수하다가 결국 8월 말이 되어서야 개봉했다. 제작비를 생각하면 기대만큼의 극장 흥행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텐트폴 작품으로서의 역할은 확실히 해냈다.
*<테넷> 관련 글: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8월 23일): (링크)
[나의 '테넷'과 루이스의 '헵타포드'를 겹쳐 생각하며](9월 8일): (링크)
내게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의 잔영을 강하게 떠올리게 만들었던 영화다. 70분의 영화제 버전과 86분의 극장 개봉 버전을 모두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영화가 관객을 만난 후 일어나는 변화를 다시 극장에서 만나는 특별한 경험이기도 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 관련 글:
['내언니전지현과 나'와 나](11월 29일): (링크)
[그립지만 돌아갈 수 없는 세계들](12월 6일): (링크)
1. 코로나19와 무관하게 올해는 영화를 적극적으로 찾아보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적은 수의 신작 영화를 본 해였다. 여러 이유들이 있었지만, 그만큼 더 많은 것을 읽고 쓰고 스스로의 항상성을 찾고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한 나날이 영화의 상영시간들을 대신했다. 어떤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보고 어떤 생각과 감정을 만났다고 적는 일이 더 소중했다. 그 외에도 <찬실이는 복도 많지>, <환상의 마로나>, <소년시절의 너>, <남매의 여름밤>, <프록시마 프로젝트> 등의 영화들 역시 언급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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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근 디즈니 인베스터 데이에서 마블은 스트리밍 서비스에 주력한 2022년까지의 라인업을 대거 발표했고, (디즈니 플러스는 2021년 국내 론칭 예정) 워너브러더스는 아예 2021년 자사 라인업 전체를 극장과 HBO Max에 동시 공개하겠다고 했다. 미국에서 제일 큰 극장 체인인 AMC는 2021년에 자사의 유동성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고 투자자들에게 고지했다. CGV도 대학로,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 등 7개 지점을 지난 10월 말부터 영업 중단했다. 7개 지점 모두 폐점은 하지 않았지만, 3년 내 30% 지점을 줄인다고 했으니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국내의 작년 극장 관객 수는 2억 2,667만 명, 올해는 작성 시점 기준 5,860만 명. 오후 9시 이후 관객 수가 일일 관객 수의 거의 1/3을 차지해서 지금도 극장은 사실상 열려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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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럼에도 어떤 영화들은 어려움 속에서 촬영을 마쳤거나 후반 작업을 진행하고 있고, 또 어떤 영화들은 더는 미룰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개봉을 감행하기도 한다. 관객의 한 사람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겠지만, 남은 올해와 내년은 그래도 조금 더 자주 극장을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직 2020년이 열아홉 날 정도 남았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3단계가 되면 영화관도 문을 닫아야 한다. 그렇게 2020년을 마무리하게 될까. 아니면 간신히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거나 더 나빠지지 않은 채로 새 날을 맞이하게 될까. 올해만큼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노력하는 일에 대해 생각한 해도 드물 것이다. (2020.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