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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Aug 07. 2024

코모레비 こもれび

언어의 발견



일이 많아 운동화 끈을 바짝 조여 매는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날이 더워 집 근처 스터디 카페로 향했다. 외출 준비를 하고 가방을 챙겨 나가는 일이 번거롭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집을 나서 공원을 가로지르는데 내 안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역시, 밖으로 나오는 게 좋구나!’

 

공원은 아침부터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로 활기를 띠었다. 매일 아침 홀로 집에서 맞는 고요는 어떤 면에서 나의 무드를 가라앉혔다. 뜻밖의 마주침에서 사람들의 활기가 내게로 옮겨 왔다. 괜스레 발걸음에 생기가 돌고 콧노래가 흥얼거려졌다.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하늘은 높게 파랗고. 아침의 투명한 빛 아래 푸른 나무들이 바람 따라 일렁였다. 여름 바람에 이쪽저쪽으로 흐르듯 춤을 추면 나뭇잎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슬몃슬몃 고개를 내밀어 인사했다. 부끄러운 듯 단정한 아침 햇살과 눈을 맞추며 최근 본 영화에서 익혔던 단어를 읊조렸다.


“코모레비 こもれび. 코모레비 こもれび*"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바로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일본말


저 건너편 정자 아래엔 동그랗게 파마머리를 한 할머니들 오순도순 모여 이제 막 꺼낸 듯한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다. 이거 한 번 봐봐, 귀엽지? 이것도 들어 봐, 재미나지? 내건 어떤데, 기가 막힐걸? 귀를 쫑긋 세워도 먼발치에서 구르는 말씨들 손에 잡히지 않지만 그 모양들 귀염 지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고. 짹짹, 째째 잭, 재재재재, 재재재재, 밤새 안녕했냐고 다정히 입 맞추는 참새들 같았다.

 



근처에는 요 며칠 이름이 궁금해 자꾸 고개를 젖히게 되는 나무가 있다. 옥수수알 같은 꽃이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모여 달린 나무. 연둣빛 잎사귀와 연한 레몬빛의 자잘한 꽃이 어우러져 예쁘다. 여름의 싱그러움을 커다란 몸에 담고 ‘내 안에 여름 있다!’하고 온몸으로 전한다. 주변으로 떨어진 연한 레몬빛 꽃송이가 점점이 흩어져 수를 놓았다.


너의 이름은 무얼까? 너의 친구가 되고 싶은데 이름을 알 수 없어 손도 내밀지 못했다. 여름 꽃나무라고 인터넷에 검색해도 똑 닮은 모습의 나무가 찾아지지 않아 궁금한 마음 두터워졌지만 조급해하진 않았다. 궁금함을 지속하다 보면 머지않아 그 이름에 닿게 될 거라고 믿으니까. 나무를 향해 이끌리는 마음이 이전에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말과 장면으로 나를 연결해 줄 테니까. 그런 식으로 알게 된 식물의 이름과 지명, 누군가의 이름이나 사물이 여럿이다.

 

내 안에 없는 것을 궁금해하는 마음이 밖의 세계와 나를 연결해 준다. 관심이 나를 바깥의 세계로 이끈다. 그러므로 무엇을 궁금해하느냐에 따라 내게 열리는 세계가 바뀐다. 내 주변으로 세계의 어떤 조각을 이어 붙일까. 어떤 세계를 덧붙여 나를 키우고 늘릴까. 매 순간 부지불식간에 그런 선택을 한다. 무언가와 마주치고 무언가를 궁금해하면서. 골몰하고 생각을 이어가면서 낌새를 느끼고 흔적을 더듬으며 나라는 사람의 지도에 길을 낸다. 한 사람이 지도라면 그의 관심사라는 발자국을 따라 지형이 그려진다.

 



간신히 일을 마치고 아이를 수영장에 데려다주었다. 다시 집을 나선 그 길 구름이 근사해 꽉 조였던 마음이 느슨해지기 시작했고. 파란 하늘에 희고 풍성한 구름이 피어올랐고 구름 가장자리로 빛이 새어 나왔다. 이토록 커다란데도 둥실 떠오를 수 있는 마음, 한시도 멈추지 않고 흐르고 흩어지길 주저하지 않는 몸. 흐름에 맡기면 매 순간 가뿐하게 자기만의 형태를 빚어낼 수 있다. 모이고 모여 부풀어 오를 때도 풀리고 풀려 옅어질 때도 구름은 모든 순간 구름이며 그 자체로 아름답다. 두텁게 쌓이면서 가벼워지고 소멸하면서 생성한다.

 

그러니 구름이라도 본 날은 꽤 괜찮은 날이다. 뭉쳐 두터워진 마음에 구멍 하나 뚫은 날은. 무거운 채로 가벼울 수 있는 마음을 기억한 날은. 아쉬움을 발판 삼아 다음으로 흐르겠다는 마음으로 충만해진 날은.


아침 바람에 일렁이는 나무의 모습이 아름다워 영상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생각지 못한 인친이 반갑게 댓글을 남겨주어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도 거리의 회화나무가 아름다워요!"


회화나무. 다듬어 주지 않아도 수형이 예쁜 나무. 나무에서 나오는 물질이 이로워 예부터 사람들이 즐겨 심었던 나무란다. 나무의 이름을 알려주신 분은 파리에 살고 계신 분인데 DM으로 글을 남겨 주셨다. 어쩐 일인지 DM에서는 ID 대신 그분의 이름으로 메시지가 날아왔고.


이름은 구별하기 위해 부르는 말. 구별은 나와 너 사이에 선을 긋는 일이지만 이름을 부르는 행위로 그 선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점처럼 떨어져 있던 나와 너를 우리라는 선으로 연결한다. 나와 당신과 회화나무, 때로는 삼각형이 된다. 내게 이름 알기는 나의 외연을 확장하는 일. 내게 먼 당신이라는 점을 향해 선을 그어 보려는 시도. 당신이라는 점을 끝없이 연결해 이름 없는 별자리를 그리기. 그건 이름 붙이지 못한 무수한 존재가 우리 곁에 있음을 기억하는 일.


궁금해하면 알게 된다. 때로는 애쓰지 않아도 소식이 닿고 전해진다. 신비롭다. 어떤 건 애를 써야 간신히 해결되는데 어떤 건 물이 흐르듯 자연스레 내게 온다. 어디에 마음을 쓸지 잘 골라야 한다.


삶은 가까스로 나아가지만 힘쓰지 않아도 흘러 들어오는 빛이 있다. 나를 열어 당신으로 잇는 빛. 회화나무 아래 '코모레비 こもれび'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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