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여행이라면
삶이 여행이라면, 여행의 묘미를 즐기기 위해 여유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예측할 수 없는 마주침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는 여유. 예상치 못한 일이 도처에서 일어나도 그 사고가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으로 우릴 이끌 거라고 기대할 수 있는 느슨함. 해야 할 일과 계획으로 꽉 찬 하루에는 내 앞에 놓여 있는 보석 같은 기쁨조차 놓쳐버리기 쉽다. 여행처럼 삶을 즐기려면 매일의 일상에 의식적으로 빈칸을 마련해야 한다.
이번 여름 휴가지는 숙소 사진만 보고 선택한 홋카이도의 시골 오두막이다. 오두막이라고 하기엔 근사한 외관과 인테리어를 가지고 있지만. 삿포로에서 차로 2시간 남짓 달려가야 하는 곳이라는 것만 알았지 지명이나 주변 정보는 찾아보지 않았다. 목적이나 계획이 없는 여행,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한 떠남이었다. 나를 둘러싼 익숙함을 지워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돌이표 되는 일상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 내는 표정 대신 다른 얼굴과 기분에 나를 맡겨 보고 싶었다.
해야 할 일에 대한 목록 없이, 마주할 풍경에 대한 청사진도 없이 백지상태 되기. 비우고 지우는 게 목적이라면 목적인 여행이랄까. 어디로도 기울지 않는 평형 상태의 마음으로 다가오는 장면과 인상을 흡수하길 바랐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차로 달렸다. 그 길에서 처음 만난 이국의 풍경은 제주도와 비슷하기도 토스카나의 끝없는 구릉을 닮기도 했다. 이차선의 차도 주변으로 숲길이 이어지다 너른 들판이 등장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시야의 반은 초록의 숲과 초원, 나머지 반은 파란 하늘. 오래 쓴 안경을 닦아 쓴 듯 시야가 맑고 선명해졌다.
숙소는 작은 마을의 가장 안쪽, 혹은 가장 끝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뒤로는 숲이고 주변은 논과 밭으로 둘러싸여 한적하고 평온했다. cabin이라는 이름처럼 나무로 천정을 올린 집은 넉넉하면서 아늑하고 구석구석 정성이 느껴지는 디테일이 보였다. 여백이 많은 편안한 공간이지만 초미니 세면대와 방마다 벽에 걸린 옷걸이, 침대 머리맡의 그림책과 거실 수납장 속 레코드판, 포인트가 되면서 실용성을 겸비한 조명에서 집주인의 세심함이 느껴졌다. 집의 모든 창문으로 푸르른 초원과 하늘이 펼쳐졌다. 아주 적합한 장소에 도착한 것 같았다.
잠시 검색해 보니 해마다 그림책 어워드 행사가 열리는 유서 깊은 도서관이 있는 고장이란다. 근처에는 그림 같은 호수와 라벤더밭이 있고. 아무런 일정 없이 왔지만 가보고 싶은 곳이 금세 만들어졌다. 4박 5일의 일정이 아쉬워졌다. 뜻밖의 만남이 기대되는 여행, 이제부터 시작이다.
계획에 한껏 힘을 주다 막상 여행지에서는 김이 빠져버린 적도 있다. 생각보다 시시하거나 계획대로 풀리지 않아 시무룩해졌던 언젠가의 기억. 그때엔 여행 자체보다 여행 계획을 세우던 시간의 설렘에 더 도취되었던 것도 같고. 계획에 힘을 주지 않으면 실망할 일 없이 여행 그 자체를 즐길 여유가 생긴다. 계획으로 마음이 분주해지지 않아 빈자리로 찾아드는 우연한 풍경과 사건을 선물처럼 맞을 수 있다. 예기치 않은 만남, 여행의 묘미란 그것이다. 여행자의 필수품은 여백이 많은 마음일 것이다.
유명하다는 그림책 도서관에 들르고, 근처의 파란색으로 유명한 호수와 꽃으로 뒤덮인 언덕도 다녀왔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숙소에서 가족들과 보낸 흔한 시간이었다. 창밖으로는 푸른 언덕이 끝없이 이어지고 천고가 높은 통나무 집은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덥지 않았다. 목욕탕의 미니어처 같은 욕실에는 작지만 깊이가 깊은 욕조가 있어 물을 받아 아이와 저녁마다 목욕을 하고 턴테이블과 레코드판이 구비되어 있어 아침저녁으로 음악을 들었다. 그랬던 시간이 내게 진정한 휴식과 함께 삶의 보석을 되찾은 듯 뿌듯함을 안겨 주었다.
그 집에 있던 레코드 판들은 잘은 모르지만 명반임에 분명한 것들일 것이다. 집주인은 자연친화적인 삶을 모토로 쓰레기 분리수거에 진심인 생활을 한다(주방에는 분리수거용 쓰레기통만 대여섯 개가 있고 그 위로 각각에 들어갈 쓰레기의 종류를 상세히 설명한 안내문이 붙여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아기자기한 그림책을 두고 손이 잘 닿는 곳에 ‘여행’과 ‘정원’, ‘집’을 주제로 하는 책을 쌓아 두었다. 섬세하게 고운 물건으로 집을 꾸미고 구석구석 생활의 먼지를 말끔하게 닦고 반들반들 윤이 나게 물건을 다듬는 사람이다. 그런 이라면 음악에 대한 취향도 꽤나 좋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서랍장에 든 여러 장의 음반을 뒤적이다 내 취향에도 딱 맞는 서너 장의 음반을 찾았다. 매일 아침 단순하면서 부드러운 선율을 풀어내는 일본 뮤지션의 경음악을 들었다. 어둠이 내리는 저녁부터 밤 사이엔 영혼의 들썩거림이 느껴지는 재즈 음악으로 시간을 감았다.
온전히 음악에만 귀를 기울였던 얼마간의 시간, 책을 읽다 읽던 책을 다리 위에 덮어 두고 멍하니 창밖의 구름을 감상하던 순간, 외출 후 돌아와 편의점에서 사 온 간식을 풀어놓고 다양한 브랜드의 맥주를 두 캔씩 마시던 밤. 그런 평범한 순간들이 기억에 남았다. 오늘까지 마쳐야 할 일감의 압박 없이, 시간이 부족하다는 조바심도 없이, 배가 부르고 술이 과하다 싶어도, 이 정도가 대수인가 싶은 배짱이 같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여행이 내게 그런 마음을 되찾아 주었다. 우리를 즐겁게 하는 건 쉽게 만날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나 거창한 장소가 아니라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일을 아무런 걱정 없이 순전히 누리는 거라고.
아침저녁으로 턴테이블에 조심스레 음반을 올리고 레코드판이 다 돌아갈 때까지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게 이토록 나를 기쁘게 하는 줄 잊고 있었다. 간단한 일인데, 시간이 많이 들거나 커다란 노력이 드는 일도 아닌데. 음악이 건네는 마법 같은 휴식을 미루었던 지난날들이 참 볼품없어 보였다. (턴테이블은 없지만 성능이 나쁘지 않은 스피커가 있는데도 말이다.) 음반 하나로 영혼이 말개지고 포근한 이불에 감싸인 듯 풍요로워졌던 기분을 기억하고 싶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음악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빈칸을 마련하는 일이다.
음반 하나, 십 분의 목욕(혹은 샤워), 맥주 한 캔이나 책 한 권처럼 진정한 위안을 주는 일을 진심을 담아 행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꽤나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사소하고 평범하지만 나를 즐겁게 해주는 일, 그걸 위해 깨끗하게 비워 둔 얼마간의 시간, 그걸 의식처럼 반복하는 일상. 알고 있었는데 어느새 잊고 말았던 작지만 소중한 진실. 내 손안에 쏙 들어오는 진실 하나를 쥐고 돌아왔다. 바삐 사느라 그걸 놓쳐 버린 어느날, 다시 여행을 떠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