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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Oct 26. 2021

설거지론 - 사랑이 조롱받는 시대

함께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그릇을 닦는 삶

언어의 파괴적인 힘이 또다시 대중을 휘어잡는 사례가 발생했다. 요 근래 SNS 상에서 매우 핫하게 달아오르고 있는 '설거지론'이다. 이번 [바다의 편린]은 아주 무기력하고 우울하다.


나는 출근길에 설거지론에 관한 게시물을 읽다 뜨악했다. 극단으로 치닫는 남녀 갈등이 더 이상 도달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사회에 이제 순수한 목적의 사랑이란 절대 자연발생할 수 없겠구나. 비혼을 넘어 비연애주의가 만연한 세상이 금방 도달하겠구나. 설령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그런 사람들은 죄다 인터넷 상에만 존재한다고 말하며 눈 가리고 아웅 하지만 우리 모두 마음속에 뿌리 깊은 불신의 싹을 숨기고 살겠구나 하는 그런 무력함. 난 언제나 사랑이 1순위의 가치라 믿었는데.


설거지론의 기분 나쁜 무력감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아마도 나 또한 대한민국 사회를 살아가는 한 명의 남성으로서 이 지론에 일정 부분 동감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거지론은 인간 내면 어딘가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미약한 추악함을 강제로 끌어올렸다. 알파 메일/베타 메일이라는 이분법을 떠나 상식 그 자체로 내 연인의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너무나 괴롭다는 것을, 특히 연애라는 한정된 카테고리 안에서 기울어진 운동장 위를 달리고 있는 현시대 남성들에게는 애써 무시하던 찝찝함을 구태여 끄집어내 눈앞에 전시하는 느낌이다. 찰나에 수많은 경험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도 고무장갑을 꼈었나?


조선일보, <공대卒 삼성 근무는 ‘퐁퐁남 풀코스’? 인터넷 달군 퐁퐁·설거지론>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설거지 '당한' 남자들만큼이나 그 맞은편에 선 여성들도 많았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흔히 '노력'을 빌미 삼아 그저 아니라고 단정만 짓던 통계의 문제다. 설거지론까지 대두되는 마당에 이제 우리는 더 물러설 곳이 없다. 인정해야 한다. 이 자본주의 사회는 사랑도 빈익빈 부익부다.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유리하다. 이는 내가 이전에 작성한 <회피형 인간의 변명>, <성매매하는 사람들>, <외모를 보지 않는 사람들>, <소중함에 속아 익숙함을 잃지 말자>에서 말한 이야기들과 궤를 같이 한다. 명백하게 남성은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연애 진입장벽을 갖고 있다. 섹스가 뭐라고.




갑작스레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존잘인싸가 아니지만 SNS가 말하는 '퐁퐁단'보다는 '지뢰설치반'에 가까운 유형의 남성인데, 사랑도 연애도 평균 이상으로 많이 받아왔고 해왔는데 왜 설거지론에 공감하고 있는 걸까?


에펨코리아, <설거지론 알고리즘.jpg>


내 나름대로의 고민 끝에 이는 내가 원치 않게 부여받은 가부장적인 사고관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착했다. 여러분에게 인정을 갈구했으니 나도 인정하겠다. 나는 사랑을 소유하는 부분에서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다. 강력한 모노가미의 사랑을 원하면서 스스로는 자유롭고 갖고 싶은 건 다 가져야만 하는 폴리아모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자유를 넘어선 방임의 사랑을 행하려 하는 중인 것이다. 대외적으로도 자랑하듯 발설하고 다녔고 속으로도 그랬다. 나, 진짜로 사랑을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게 맞는 걸까?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부류의 못난 인간인데.


문득 내가 스물셋에 한 친구의 연애 고민을 가만히 듣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성경험이 없는 애가 좋아"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나는 그녀들의 처음이 되고 싶었지만 마지막이 되고 싶진 않았다. 특히 물리적으로 말이다. 그러곤 흥미가 떨어졌을 때쯤이면 뭐든 내가 행복한 게 중요하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내 권태를 정당화하려 했다. 직접 설거지하는 게 아니라 음식물이 잔뜩 묻은 접시들을 억지로 떠넘기고 싶었던 것이다. 갑자기 울컥한다. 내 과거의 사랑스러운 기억들은 절대 그런 식으로 폄훼할 수 있는 내러티브가 아닌데. 식기세척기에 깔끔하게 건조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그저 찬물에 대강 헹궈져 떠오르고 있었다.


에타


요즘 들어 연애를 비관하는 내 상황이 그제야 이해됐다. 직장을 가지면서 사적인 시간은 압도적으로 줄었으나 왜인지 모르게 사랑의 수량은 그만큼 늘었다. 더는 학생 때처럼 순수한 감정의 사랑이 불가능하다 느꼈던 몇몇 사례들 때문에 나는 되려 더 극악무도해졌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아무렇지 않게 무례함을 꺼내는 나를 꾸준히 사랑해 주는 감사한 사람들에게 속으로 외쳤던 것이다. 너는 '내'가 아니라 내 '조건'을 보고 있잖아! 그럼 대체 나는 당신들에게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설거지론이 더 절망적인 것은 이제 거의 모든 형태의 사랑을 경험한 이십 대 후반 남성으로서의 내가 어느 레이스에도 낄 수 없는 후발주자가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애초에 풋풋한 첫사랑을 여전히 지속하고 있거나 때가 (잘못된 표현임은 물론 인지하고 있다.) 덜 탄 짝을 만난 장기연애자들, 사랑에 낙담한 비혼주의자가 아닌 이상에야 이 '정리'라는 부분에서 스스로 끊임없이 타협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쁘고 몸매도 좋지만 처녀면서 번듯한 직장을 가진 나와 영혼이 딱 맞는 어린 사람'이란 절대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는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수긍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랑에 있어 '동등'하다는 말은 무엇일까. 나는 설거지론이 일반적인 세대 담합과 달리 30-40의 남성들뿐만 아니라 10-20의 남성들을 포괄할 수 있는 이유가 이 동등함에 있다 여긴다. 어느새 사용이 자연스러워진 '독박육아'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자. 이 말은 설거지론만큼이나 나를 무력하게 만든 낱말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는데 어떻게 그를 '독박'이라고 표현하는 거지? 외벌이 가정 혹은 소득 격차가 확연하게 나는 남녀를 계산적으로 갈라놓고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사랑의 결과물에 독박이라는 용어가 끼어드는지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설거지론과 독박육아. 그저 아이라는 이 작고 소중한 개체 때문에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 속이며 서로를 억지로 이어 붙이는 찐득찐득한 접착의 단어들.


에타


일반적으로 너드남이라고 인식되는 공대생들(대개 남성)이 사회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며 높아진 수입을 바탕으로 20대 때 만나지 못했던 '급'이 다른 여성을 취하는 것은 계층을 전복한 사랑인가 설거지인가. 과거의 정조를 따지던 유교 꼰대들을 보란 듯이 자유주의로 혼쭐 낸 우리 세대에게 과연 돈과 순결은 같은 무게를 지닌 재화인가. 유부남들에게는 의심을 미혼남에게는 공포를 심어주는 이 비관의 설거지론은 정말 우리가 이제야 갑작스럽게 조명한 이슈인가. 최근 이 의혹과 당혹으로 친자확인 사이트가 폭발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나는 더욱더 비참해진다. 나는 무엇을 위해 '발전'하고 있었던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 비공식적인 기록까지 더듬어 올라가게 된다. 그때 당시의 의심스러운 정황들. 짜 맞춰지는 퍼즐. 내가 쓴 사랑의 말과 기록들. 눈앞에 터진 불꽃과 섬광, 열기 이후의 차게 식어버린 메시지들. 모든 게 다 무의미해진다. 난 대체 무엇을 위해 내 손과 어깨, 무릎을 내준 것일까. 난 대체 무엇 때문에 눈을 응시하고, 머리를 쓰다듬고, 허리를 흔들었을까. 책임 없는 쾌락을 가진 나와 너를 짐승으로 비유하는 게 아니라 인간을 한 마리의 초라한 짐승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금. 도대체 섹스가 뭐라고.




설거지론은 모두에게 흠집만 내는 양날의 검이다. 명백히 페미니즘의 대척점으로 발발한 주제처럼 보이는 철저한 남성 위주의 서사지만 그 화살촉이 찌르는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과 남성 모두 다. 그러니 우리 모두 설거지론 앞에 죄책감을 떠넘기고 굴욕감을 느끼며 자조하는 중인 것이다.


그것을 희화화하며 사랑을 포기한 사람들과 후회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본인의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의심을 못 본 체하는 사람들. 부정하는 사람들. 부정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곁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과 찬장 아래 주방세제를 숨기며 시치미 떼는 사람들. 거품을 내며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 돌아보니 누군가의 그릇이 된 그릇된 사람들. 음식이 된 사람들. 음식물 찌꺼기가 된 사람들. 허리를 굽혀 설거지하는 사람들. 식사를 마쳤음에도 설거지거리를 쌓아두는 사람들. 식기세척기를 구매하는 사람들. 굶어 죽는 사람들. 모두.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설거지론은 그래서 사장되어야 하는 말이다. 위협 소구는 일시적인 매출을 기대할 수 있으나 거대한 후폭풍을 몰고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말할 수 없는, 말해선 안 되는 두려움은 구태여 대응할 필요도 없는 미래의 불확신마저 부정으로 물들게 한다. 중고품, 떨어진 불량식품, 의무 방어전, 내무부장관, 인간 ATM, 취집, 셔터맨, 한남, 한녀, 흉자, 트로피 와이프, 설거지. 우리는 언제까지 이 부정의 단어들로 서로를 걸러내며 내가 1도 모르는 무한한 사람들을 유한하게 정의할 것인가.


결혼은 현실이다. 설거지론의 대전제다. 그러나 나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사랑을 쫓는다. 그대들이 그런 내 사랑을 조롱해도 좋다. 함께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그릇을 닦는 삶. 나는 그게 사랑이라고 믿고 싶다. 아니, 굳게 믿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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