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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독일 6_백조의 성 퓌센 & 뉘른베르크

바쁘게 다니면서도 의미 있는 만남을 하고, 풍성한 역사를 경험한 날

간밤에 우크라이나 20대 또래 룸메이트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잔 다음 날, 오전 9시쯤 열차를 타고 퓌센으로 향했다. 거리를 검색해보니 그날도 6시간 정도 걸렸구나. 6시간 이상을 이동하면서 걷고, 열차를 타고 갈아타고, 그러다가 이따금 쉬고 그러는 일정을 난 매일 혹은 이틀에 한 번씩은 소화했던 것. 뭐 지금 그렇게 하라고 해도 할 수는 있겠지만, 확실히 이때만큼 무작정 이렇게 시간을 소비하지는 않겠다. 일정을 미리 더 잘 짜서 근교 도시들을 묶어서 다 보고, 이동시간을 최대한 줄이겠지. 특히 누구라도 데려간다면, 음. 이렇게는 절대 안 된다.


뭐 아무튼 더 젊을 때 체력은 남아돈다는 건 확실한 진리라고 하자.

앞 포스팅 말레이시아 편에서 쓴, 할아버지가 추천해주신 선글라스

열차를 타서 졸고, 책을 보고, 간식을 먹고, 갈아타고 또 조는 것을 반복해 가다 보니...

어느덧 퓌센 역에 도착했고, 큰 배낭은 역 보관소에 보관 후 아마 작은 가방만 들고 관광지를 다녀왔을 것이다.

퓌센 역에서 관광지로 걸어가는 길에 나타난 호수
퓌센 [ Fussen ]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지대 인근의 알게우알프스 산맥 동쪽 끝 레히강(江) 연안에 있다. 옛 로마제국의 국경초소가 있던 지역이며 628년에 세워진 베네딕투스회 성마그누스수도원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했다. 1294년 자치시가 되었다. 1745년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바이에른군대를 철수시키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현재의 성마그누스수도원과 교회는 1701년에서부터 1917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지은 것인데, 교회의 지하실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되어 있다. 도시에서 4km 떨어진 곳에는 슈반가우 숲이 펼쳐지는데, 그 숲 한자락에 월트디즈니가 디즈니랜드의 성을 지을 때 모델로 삼았다는 노이슈반슈타인성이 있다. 이 성은 중세 기사 전설에 매료된 바이에른 국왕 루드비히 2세가 지었다. 관광 휴양지이며 겨울 스포츠의 중심지이다. 주요 생산품은 의류와 밧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퓌센 (두산백과)
4km쯤 걸어가던 길에 본 풍경

역에서 관광지로 가는 버스가 2~30분 정도마다 한 대가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걸 놓쳐서, 이렇게 걸어갔던 거 같다. 시간이 있으면 이렇게 거닐면서 좋은 풍경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 급할 게 없었기에,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걸으면서 이 광경을 눈과 사진 그리고 내 추억으로 담았다. 좀 더웠지만 하늘은 청명했고 숲은 푸르렀으며, 주변 공기 또한 맑았다.

참, 도중에 한국 여대생도 만났었지. 그러니 내가 찍힌 사진이 있지...


이 주변에서 찍은 사진들은 거의 다 그림이다. 아마 여길 여행한 분들은 대체로 맘에 드는 사진들을 건졌을 거 같다. 소도시인 퓌센임에도 2시간 내외로 다소 짧게 보고 갈 수 있는 이 관광지에서, 그 사실만으로도 방문자가 많을 만도 했다.

호엔슈방가우 성


호엔슈반가우성 [ Hohenschwangau ]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노이슈반슈타인성(城)과 마주보고 있다. 루트비히 2세의 아버지이자 바이에른의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Ⅱ)가 지은 성이다. 성 안에는 동양의 미술품과 예술작품 등이 보관되어 있으며, 3층에는 왕이 작곡가 빌헬름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와 함께 연주한 피아노가 전시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엔슈반가우성 (두산백과)

이 성도 예뻤지만,

역시, 이 성의 자태 앞에서는 다소 밋밋해 보였다.

노이슈반슈타인 성

바로 디즈니랜드 성의 모델이자 백조의 성이라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그 한국 여대생은 이날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져와서 여기서 날 찍어주었다. 그 사진은 바로 인화되었고 간직했었던 그 사진을 떠올리면, 그날 들떴던 내 표정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아직도, 그 순간이 기억난다.


노이슈반슈타인 성 [ Schloss Neuschwanstein ]
제작시기: 1880년
건축가: 크리스티안 얀크, 에두아르트 리델
위치: 독일 호엔슈반가우
양식: 고딕 복고
재료: 돌, 강철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수많은 엽서, 퍼즐, 광고는 물론 저 유명한 디즈니랜드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 등장하는 성의 모델까지 된 덕분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성 중의 하나로, 노이슈반슈타인이 세워지게 된 경위 또한 성 자체만큼이나 잊히지 않는다.

바이에른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1864~1886년 재위)는 왕이 된 지 2년 만에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주권을 잃고 이름뿐인 왕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정세로 인한 압박감에 본래 심약한 성품이 더해져 그는 고결한 왕들과 강인한 게르만족 신화 속의 신들이 사는 바그너 풍의 몽상의 세계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그는 산꼭대기의 어린 시절 고향에 틀어박혀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비롯한 환상적인 중세의 성을 짓는 데에 여생의 대부분과 재산의 전부를 쏟아부었다. 1886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완성되지 못했지만, 노이슈반슈타인의 방들은 웅장하기 그지없다.

외관은 중세지만, 중앙난방, 수도, 수세식 화장실, 심지어 전화에 이르기까지 근대 문명의 이기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루트비히의 몽상을 현실로 만들어준 크리스티안 얀크(1833~1888년)의 원래 직업은 무대 감독이었으며, 노이슈반슈타인은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단순히 중세의 성을 충실히 재건한 것이 아니라, 로마네스크, 비잔틴, 고딕 양식이 한데 어우러져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다. 모든 방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그 밖의 바그너 테마를 묘사한 조각과 프레스코를 볼 수 있으며, 성 전체로 보았을 때에는 중세의 성배 전설을 표현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이슈반슈타인 성 [Schloss Neuschwanstein]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2009. 1. 20., 마크 어빙, 피터 ST. 존, 박누리, 정상희, 김희진, 위키미디어 커먼즈)
다리에서 저 성을 찍었고, 다리 아래에는 이런 광경이. 높이가 꽤 있다

생각해보니 저 성을 가장 멋지게 볼 수 있는 이 거리에 다리를 짓고 관광객들이 이동하도록 해 놓지 않았겠는가 싶었다. 이 다리에선 다들 저 성과 관광객 본인의 사진이 같이 나오도록 '인증'을 해야 했다. 그땐 특히 나도 그랬지만 지금은 음. 다시 가도, 성이 정말 아니 너무 예뻐서 같이 찍고 오지 않으면 안 될 듯싶다. 어찌 보면 내가 랜드마크를 대할 때의 생각이다. 그곳의 '랜드마크'는 인증숏을 찍게 해올뿐 아니라 지나고 보면 그 랜드마크에 대해 더 찾아볼 수 있게 된다. 해당 지역에 있는 랜드마크는 역사, 경제, 혹은 정치에까지 연관돼 있는 경우가 많아 그곳을 이해할 수 있는 풍성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덤이다. 그래서 그땐 단순히 사진만 찍고 올지라도, 이렇게 나 또한 다시 관련 내용을 찾아보며 독일의 역사와 건축가까지 찾아보게 되는 게 아닐는지.

성 가까이 가서 보면 이렇다. 멀리서 본 그 감흥까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땐, 그 안까진 들어가 보지 않았다. 하지만 위에 쓴 내용을 인용해 무대감독이었다는 얀크가, 루트비히 왕의 몽상을 현실로 만들어주기 위해 중앙난방, 수도, 수세식 화장실, 심지어 전화에 이르기까지 근대 문명의 이기들을 두루 갖추어 건축했다는 것. 이 내용을 읽고 지금은 내부를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렇게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모으는, 대단히 훌륭한 건축물이라는 것!

나보다 몇 살 동생이었던 그녀와 난, 편하게 데이트를 하면서 서로 사진도 찍어준 거 같다. 그저 주변의 예쁜 성들과 풍경을 보며 만끽하기에도 부족했다. 바로 거기, 동화 같은 소도시에서...


오후 4시 반이 지날 무렵 우린, 이내 헤어짐의 인사를 하고 다시 각자의 여행길에 올랐다.



이후 난 계획대로 저녁에 민우형을 만나러, 퓌센 역으로 돌아가서 뉘른베르크행 열차에 탑승했다. 퓌센 역에서 뉘른베르크역까진 4시간 정도. 물론 이렇게 교통수단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지만 특히 유럽의 열차 유레일은 흔들림도 별로 없었고 전체적으로 환경이 쾌적했다. 난 2등석으로 다녔는데 자리도 좁지 않은 편이며, 에어컨도 나오고 깔끔했다. 즉 여행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환경이었다는 거. 그렇게 그 4시간도 금방 흘러갔다.


열차는 곧 뉘른베르크역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드렸던 민우형과 만났다. 민우형은 내가 군대에 가기 전 몇 달간 일했던 집 앞 책 대여점에서 알게 된 분이었다. 나이차가 4살 이상이었던 형님인데, 이 형님은 내가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여쭤볼 때 친절히 답해주시고 그에 대한 근거 또한 잘 말씀해주셨던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부터 연락해서 전역 후, 유럽을 여행하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실제로 이곳까지 와서 뵙게 된 것. 담배가 면세점에서 꽤 저렴했던 시절, 사가서 선물부터 해 드렸던 기억이 난다.


형은, 내가 숙소를 안 잡았다고 하니 바로 무난한 호스텔로 데려가 주셨다.

뉘른베르크 [ Nuremberg ]
독일 바이에른(바바리아)주(州) 제2의 도시

마인강(江)의 지류 페그니츠강(江) 우안(右岸)의 해발고도 300m 지점에 위치하는 독일 유수의 상공업도시이다. 오랜 제국도시로서 옛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환상성벽(環狀城壁)과 역사적인 탑, 재건된 성이나 교회가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고딕이나 르네상스의 유명한 건축물로는 화가 A.뒤러의 집과 제바르도스교회·로렌츠교회·프라우엔교회 등이 있다. 그 밖에 시청사·독일자연사박물관·교통박물관·천문대, 그리고 경제·사회과학 학부가 있는 종합대학·사범대학, 조형미술 아카데미, 응용미술 아카데미 등이 있다.

1219년 제국도시가 되어 제국의회가 열렸으며, 1424∼1796년 제국의 보물이 간직되어 있었으나, 성주에 대한 독립투쟁이 일어나 1427년 시(市)에 성을 매도하였다. 15∼16세기는 예술과 과학의 최성기로서 A.뒤러, 조각가 A.크라프트, V.슈토스, 황동 주조공 P.비셔, 시인 H.작스 등이 활약하였으며, 1525년 종교개혁 때에는 프로테스탄트 쪽에 섰으며, 1532년에는 ‘뉘른베르크의 종교회의’를 체결하는 등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1806년 바이에른령(領)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연합군에 의한 독일전범의 나치(Nazi) 군사재판이 열렸다.

현재는 근대공업의 중심도시이며, 교외에는 금속·전기·기계·자동차·광학기계·완구·문방구 등의 공장이 많다. 또 마인강과의 사이에는 운하가 통하여, 그 연안을 따라 새로운 공장지대가 형성되었으며, 특히 완구박람회가 열리는 도시로 널리 알려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뉘른베르크 [Nuremberg] (두산백과)

그때 무심코 들었던 거 같지만, 이런 엄청난 기운이 있었던 도시였다니. 나치 전범 군사재판이 열린 곳이었다.

역에서 중심가로 걸어가면서 본 길거리 재즈그룹 행위예술가
뉘른베르크 광장에 있던, '아름다운 분수'라는 뜻의 쇠너부르넨(Schoner Brunnen)
벨기에 편에서도 적은, 'Hostelling International'에 등록된 호스텔

역에서 도보로 20분쯤 걸린, 가격 및 시설도 무난한 호스텔로 기억.

'Hostelling International'에 등록된 숙소는, 유럽은 물론 전 세계 어디를 가도 2성급 이상의 다소 쾌적하고 무난한 가격, 시설이 보장돼 있기에 추천할 만한 곳이다.


바로 짐을 두고 형과 밖으로 나갔다.

뉘른베르크에선, 특히 유명한 미술가가 있었고 형이 그 주변의 볼만한 곳이 있다고 해서 따라갔다.


알브레히트 뒤러 [ ALBRECHT DÜRER ]
요약: 독일의 가장 중요한 미술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경험한 선구적인 북유럽 미술가였으며 장인이기보다는 지식인이기를 원했던 최초의 미술가로서 '르네상스인'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회화와 판화로 당대에 높은 명성을 얻었으며 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스티븐 파딩, 위키미디어 커먼즈, 프랑스 국립박물관 연합(RMN))

바로 뒤러라는 사람이 여기서 유명했는데,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나 전성기도, 죽음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 사람과 역사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지나갔지만 더 흥미로운 사실도 있어 아래 찍어둔 사진과 함께 내용을 더 적는다.

바위굴(Felsengängen). 지하수를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뚫거나, 맥주를 발효시키거나 저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스물 세 번째 이야기; 뉘른베르크
알브레히트 뒤러 광장의 지하에는 그 유명한 바위굴(Felsengängen)이 있다. 바위굴의 입구는 뒤러의 동상 뒤편에 있다. 뉘른베르크의 지하 바위굴은 지하수를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뚫거나, 맥주를 발효시키거나 저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다. 1303년의 뉘른베르크 맥주 순수령에서는 밀과 호밀은 제빵에만 사용하고 맥주 제조에는 보리 맥아만을 사용하도록 했다.

1380년 뉘른베르크 시의회는 맥주를 상업적으로 양조하려면 지하저장시설을 갖추도록 법률로 정했다. 바위 동굴은 섭씨 8~12도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뉘른베르크에는 많게는 42개의 양조장이 있었다. 따라서 각 양조장들은 집 아래 사암을 뚫어 지하 동굴을 건설하게 됐다. 4층 깊이로 바위를 파고 이웃의 허락을 얻어 옆으로 확장시켰다.

지하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2만5000㎢ 면적의 사암 지형에 미로 형태의 굴을 팠다. 그리고 환기체계를 개발해 신선한 공기가 유입되도록 했다. 오늘날 알려진 지하 바위동굴은 주로 뉘른베르크 구시가의 북쪽에 몰려있지만, 구시가의 남쪽에도 많은 양조장들이 있었기 때문에 공개되지 않은 지하 동굴이나 저장소가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뉘른베르크의 지하 동굴은 공습 대피소로 활용됐다. 1945년 1월 2일 저녁의 대대적인 공습은 구시가의 90%를 파괴하는 가공할 수준이었지만, 비슷한 규모의 공습이 이뤄진 드레스덴, 쾰른, 카셀, 도르트문트, 함부르크 등의 도시에 비해 뉘른베르크의 주민들의 사망자수는 월등이 낮았다. 뿐만 아니라 지하통로와 저장시설은 교회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예술작품을 대피시키는 장소로 활용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독일 국민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특히 1945년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미국과 영국의 항공기 800대가 출격해 무려 3900톤의 폭탄을 퍼부은 드레스덴에서는 무려 13만 명이 죽고 아름다운 도시가 초토화됐다. 미국의 풍자소설가 커트 보네거트는 21살이 되던 해 벌지 전투에서 포로가 돼 드레스덴 인근에 있는 ‘제5 도살장’이라는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는 동안 이 폭격을 겪었다. 다행히 지하에 있는 고기 저장고에 들어갈 수 있어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그 경험이 소설 ‘제5 도살장’에 담겨있다.
© 양기화; KUKINEWS


나치 독일의 역사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해볼 수밖에 없는 도시.

지나간 일이라지만 역사이기에 그 사실을 알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걸어가다 본, 해 질 녘에 레스토랑 조명이 분위기에 잘 어울렸던 장면

이제, 저녁을 먹으러 레스토랑을 가려고 주변을 둘러보던 도중

'아, 맥주와 소시지로 유명한 독일이었지!'를 절로 느꼈던, 그 순간의 장면을 담아냈다.


그 주변을 맴맴 돌다가, 더는 못 참고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먹음직스러운 소시지와 같이 있는 건 양배추 절임음식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

독일인들의 맥주와 소시지 사랑은 둘째라 치면 서러울 정도로 유별나다. 독일의 소시지 종류는 무려 1,500가지 이상이라고 한다. <나무위키>


참, 도중에 한인교회에서 아셨다는 피아노를 잘 치신다는 누나 분도 동승했다. 그 당시엔 특히, 사람과 가리지 않고 대화하면서 교류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형께도 앞서 같이 보는 것을 괜찮다고 했었던 거 같다. 형과 난, 그간의 안부를 이야기했다.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 1년, 전역 후 2년 뒤니 대략 5년 정도 가끔 소식을 교류한 형이다. 당시 난 대학교 1학년부터 형을 알았고 형은 그때 회사에 한창 다니셨을 것이다. 그러다 나는 대학 3학년 때 졸업 전에 유럽을 갔던 것이고, 형은 회사에서 주재원으로 독일에 가셨다는 거로 기억한다. 그리곤 결혼도 하시고 형수님과 그곳에서 살고 계신다고 했다. 3학년인 내가 빠르게 취업을 생각했더라면 형과 진로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눴을 텐데 그보다 난, 형이 이곳에 있으시다니 보고 싶어 찾아왔던 거 같다.


그 이유를 지금 또 돌이켜보니, 내가 군에서 종종 전화했을 때 잘 받아주시고 좋은 말씀과 격려를 해주셨던 것이 난 고마웠던 것이다. 그게 감사해서 유럽을 갈 때 꼭 찾아뵙겠다고 다짐했던 것이고, 그 말을 지키려고 독일 뉘른베르크라는 도시까지 찾아갔었다.

지금은 아마 한국에 있으실 텐데. 연락이 끊긴 좋은 이 형님도 소식이 궁금하다

그렇게 담소를 나누고 형과 막차 시간이 됐다고 해서 헤어졌는데 그 내용은 앞에 적은 이상으로 세세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다만 형과 그 누나는, 내 여행을 응원해주셨다는 것.

유럽이야 뭐, 언제 어디서 봐도 예쁘다지만 시원하고 알코올이 들어간 맥주 그리고 맛있는 소시지를 곁들인 후에 본 뉘른베르크의 야경은 멋졌다. 술도 들어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뭣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였기에!

그날 밤에 숙소에서 본 뉘른베르크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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