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반에 잠에서 깼다. 잠이 부족했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이북 청취 기능이다. 전자책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인기도 최상위에 새번역 유토피아가 있었다. 뭐든 새로운 게 좋다. 꿈나라 대신 어디에도 없는 나라로 향했다.
짧게 독후감 남긴다. 독후감은 크게 4가지 토픽으로 진행 될 것이다. 출판 배경, 유토피아 설명, 저자의 문제의식, 나의 해석이다.
출판 배경은 인상적이었다. 16세기 영국 사람이 전언 형식을 빌려 쓴 소설이다. 토마스 모어가 쓴 책이지만 사실상 공저다.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대폭 손봤다. 심지어 그가 라틴어 제목을 희랍어인 유토피아(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의미는 동일)로 바꿨다. 그외의 토머스 럽셋, 베아투스 레나누스가 수정에 참여했다. 결국 당시 인문주의자 공동의 산물이 되어버렸다. 참고로 인문주의자는 인간 존중, 문화 발전을 지향하는 인물을 뜻한다. 계몽주의와 궤를 같이 한다.
유토피아는 어떤 곳인가? 이타적,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이상적 국가다. 16세기 유럽에서 그리는 최고의 국가상을 엿볼 수 있다. 특징은 사유재산이 없고, 모두가 노동에 참여하며, 덕분에 하루 평균 노동 시간이 짧고(6시간), 지방 국가 연합이며, 사적인 욕망이 배제되고, 공동체주의를 기치로 내건다. 노동을 숭고히 여기며, 농업을 기본으로 한다. 종교의 자유가 있고(그러나 커뮤니티 대소사를 특정 유일신 종교가 관장), 비폭력을 지향한다. 싸움이 있으면 중상모략이나 남의 손에 피 묻히는 방식 등을 통해 국민들의 생명과 신체를 지키는 걸 제1 가치로 여긴다. 네것 내것 구분 없이 타인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처럼 키워주기도 한다. 그리스 철학가, 특히 플라톤의 사상을 주로 차용했다. 엘리트에 의해 운영되는 대의정치국이다.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노예제, 식민지를 인정한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화폐제 철폐와 금을 노예의 상징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모어와 인문주의자 친구들이 가진 문제의식은 확실하다. 1. 사유재산은 본질적으로 불평등을 초례한다. 2. 불로소득이 노동 소득보다 크다. 3. 왕과 귀족이 힘을 대물림해 남 위에 군림한다. 4. 화폐가 사유재산을 만든다. 5. 사유재산은 낭비를 조장한다. 요컨대 불합리한 상상의 질서에서 탈피할 필요를 느꼈단 의미다.
신번역본은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몇 편의 편지가 첨부됐다. 그 당시 저작에 관련된 이들의 비평이 나온다. 이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자도, 독자도 유토피아의 모순을 인식한다. 저자의 해명은 모든 국가가 모순을 갖고 있으므로 유토피아도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모순 없는 국가는 없다. 당시의 이상이 지금의 이상일 수 없다. 여성, 노예, 인종, 타국가를 대하는 태도는 우리 시대와 맞지 않는다. 시대의 한계가 분명하다. 또한 어느 시대가 돼도 인간의 집합인 사회는 필연적으로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알려준다.
내가 가장 의문을 품은 부분은 화폐 철폐다. 화폐는 국가가 성장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화폐 없이는 무한대에 가까워지는 물건 교환식을 감당할 수 없다. 규모의 경제를 포기해야 한다. 화폐를 포기하려면 동네 마을 사이즈로 국가의 크기를 줄여야 한다. 정확한 분배를 할 수 없다. 시대를 역행할 수밖에 없다. 국가간 거래에 한계가 생기며 기준이 없어 통제나 관리가 안 된다. 화폐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았던 시기의 한계다.
차등적 인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자녀들은 부모의 소유고, 여성은 남편의 소유다. 노예제도 인정한다. 또한 용병의 목숨 값을 가벼이 여긴다. 호전적 용병(북유럽 인종 모델)은 쉽게 쓰고 버리기 좋다. 이기면 자국민 손에 피 안 묻혀서 좋고, 그들이 죽으면 임금 지불 안 해서 좋고, 이 세계에 야만인 개체 수를 줄여서 좋다고 한다. 21세의 교육을 받은 내게 유토피아는 야만이다.
유토피아는 최선의 집합으로써 구성원도 최선이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라의 요구에 응하고, 나라가 느꼈으면 하는 감정을 기꺼이 느껴준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식이다. 국민의 모습을 그릴 때 '취지가 이렇게 좋으니 국민들도 모두가 행복하고 만족한다'라고 말한다. 만족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이것이 유토피아, 바로 존재하지 않는 국가다. 유토피아의 인간은 단면적이다. 구성원 모두가 심지어 식민지 국민과 노예조차 유토피아에선 행복하다.
차등 없는 하루 6시간 근무는 마음에 든다. 디테일은 그렇지 않다. 오전 3시간 일하고 다같이 2시간 식사 겸 담소, 오후 3시간 일하고 다같이 저녁 식사와 파티. 30시간 근무제는 합리적이다. 다만 주민센터에서 다 같이 식사하고, 대화하는 건 불편하다. 혼자 집에서 밥 먹고 낮잠 자고 싶다. 유토피아에서 단체 행동은 너무 즐겁기 때문에, 강제가 아녀도 모든 국민이 자진해서 집단으로 행동한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해야 하는 나로선 내키지도 않는 일을 해야 한다. 반감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천만 혼밥러와 히키코모리가 동조한다. 명령이 없다고 압력이 없는 게 아니다. 무언의 명령, 관습의 명령에 의해 군중 속 나로 존재해야 한다. 유토피아의 행복 강요가 불편하다.
유토피아는 인문주의 운동의 상징이다. 지식인들이 미래상을 그리고 시민들이 동조해 줬다. 덕분에 21세기에 폭넓은 자유와 인권 의식을 누리고 있다. 거기까지다. 이미 사회 변화의 역할은 다 했다. 2021년엔 과거를 파악하기 위한 자료로써 의미 있다. 2021년의 토마스 모어가 우연히 타항성계로 가서 관찰한 2021 유토피아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