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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신쥬디 Feb 26. 2024

나의 첫 직장 크루즈 피아니스트,그 시작

설렘 가득 안고 탑승한 내 일터, 미국 크루즈

2015년 초, 보스턴에서 학업을 마치고 대학원 입학까지 약 7개월이 붕 떴다.

7개월간 놀 법도 한데, 놀면 불안했던 과거의 나는 '7개월을 어떻게 보내나' 고민하던 찰나, 우연히 크루즈 피아니스트직 제안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주어진 정보도 너무 없었고, 크루즈가 뭔지도 잘 몰랐으며, 내가 어떤 환경에 처해진 건지 몰라도 너------무 모르는 채로 일을 받아들였다.


내가 아는 정보는 딱 이 정도였다:

- 4월 28일 플로리다행 비행기표를 받게 될 것.

- 4월 29일 Fort Lauderdale 항구에서 Zaandam이라는 배에 승선하게 될 것.

- 4월 29일부터 7월 말까지 약 세 달간 크루즈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하게 될 것.

- 크루즈 내에서 숙식이 제공될 것.

- 크루즈는 알래스카를 항해하게 될 것.

- 월급.

- Zaandam 배의 동선:


무슨 음악을 연주하는가? 모름

하루에 몇 시간 연주하는가? 모름

누구랑 연주하는가? 모름

주거환경은 어떤가? 모름

배에서 얼마나 자주 내릴 수 있는가? 모름

뭘 챙겨야 하는가? 모름


그때만 해도 유튜브가 지금처럼 활성화되어있지 않았고 주변에 크루즈 유경험자도 한 명도 없었는지라 딱히 정보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솔직히 별로 찾아보려 노력하지 않았다.ㅋㅋ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하게 될지 1도 모르면서 걱정보다는 마냥 신났던 것 같다.ㅋㅋㅋㅋ


보스턴 -> 플로리다행 비행기와 호텔을 회사에서 제공해 줬는데 늘 내돈내산이던 비행기를 "회사"에서 지불해 주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 약간 성공한 뮤지션 느낌적인 느낌인데??’ㅋㅋㅋㅋ

(지금 생각하니 그냥 피아노동자 이동비 ^^)


플로리다 호텔에서 하루 쉬고, 바로 다음날 이른 아침, 회사 벤이 나를 픽업해서 항구로 데려갔고 거기서 Zaandam 배를 딱! 마주했다!


2015/4/29 Facebook에 사진과 함께 남긴 일기


자 여러분.. 앞으로 3개월간 이 배는 이제 내 집이에요. 파나마 운하와 서부 해안을 거쳐서 알래스카까지 항해하는 크루즈에서 피아니스트로 일을 할 거예요. 인터넷 사용이 제한될 거지만 가끔 멋진 사진들로 소식 전할게요. :) Bye, 땅!!




이름, 직업, 방번호가 적힌 welcome 패키지를 받고

직원 일행을 따라 짐을 끌고 배로 들어갔다.


일단 짐을 내려놓으러 숙소 A039로 안내받았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청소가 안된 상태여서 지저분했고 방은 매우.. 매우.. 매우... 비좁았다.


이층 침대, 옷장 두 개, 책상 하나, 샤워부스 딸린 화장실. 세상에.. 이렇게 좁은 데서 두 명이 지낸다고..? 놀랄 새도 없이 나는 부랴부랴 다른 곳으로 안내받았다. 직원 한 명이 나를 데리고 다니며 배를 구경시켜 줬다. 모든 게 신기하고, 크고 화려했다.

(후에 훨씬 큰 배에서 일해보니 Zaandam은 baby size라는 걸 이제 안다.)

그리고 길치인 나는 이미 길치 모드 on ^^


당시 iphone 4?으로 찍은 배 이모저모 ㅋㅋㅋㅋㅋ



길치모드 최대치 상태였는데 갑자기 연주를 해야 한다며 현장에 불려 갔다. (?)

6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 기타리스트 James가 밴드리더라며 나타났고, 후에 드러머 Will, 베이시스트 Diego, 또 다른 피아니스트 George, 싱어 Ashley가 나타났다. 그렇게 처음 만난 5인 + 나, 이렇게 6인조 밴드는 연주를 시작했다.

새로운 승객들을 싣고 배가 출항할 때 루프탑 풀장에서 하는 "Sail Away" 공연이라고 했다.

(아니.. 아까 메인 공연장 보여줬으면서 루프탑 풀장 긱이 웬 말입니까..? 리허설도 없이요..?)


아이패드와 page turner 페달을 받아 작동 방법을 대충 배우고 밴드리더 James의 카운트로 우리는 연주를 시작했다.


난생처음 듣는 곡들을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과

난생처음 온 공간에서

50분가량 연주했다.


초견으로 연주하기 어려운 악보는 아니었지만 상황도 상황인지라 초집중해야만 했다.

(아... 앞으로 매일 이런 거 하는 건가...? 이 밴드멤버들도 오늘 처음 온 건가..? 누가 제발 내게 설명 좀...;;;;)


아래는 당시 Facebook에 썼던 일기:


2015/4/29 수요일

수요일 아침 11시쯤에 배에 탑승했고, "직원"으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계약을 구두로 확인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내게 주어진 정보는 너무 없고,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오늘 처음 탑승한 직원들은 나처럼 어리바리 ~_~
혹시 크루즈 일을 고려하고 있다면, 인내심 향상 챌린지를 기대하시라 ㅋㅋ 오리엔테이션은 역시나.. 나의 궁금증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선실은 내가 기대한 것보다 더 나쁘다.
이층 침대, 작은 책상 하나, 답답한 화장실, 당연히 자연광 없는 암흑 같은 방. 하지만 크루즈 경력자들에 따르면, 이 회사의 crew 숙소는 다른 회사들보다 훨씬 더 좋다고 하니 감사히 생각하겠습니다. ( _ _ )
밴드리더로부터 간단한 소개를 듣고 바로 4시에 리허설 없이 공연을 했는데, 보통 우리는 리허설을 하지 않나 보다.. 과연 공연 꼬락서니가 괜찮을까?
그렇지만 그만큼의 자유시간이 있다는 뜻일 테니 기대해 보겠어. 첫 공연이 내 기준엔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안 듣는 것 같아서(?) 괜찮았다.
승객들 음식 먹느라 바빠 보였음ㅋㅋㅋ 나라도 그랬을 거야 ㅋㅋ

밤에 잠깐 또 연주를 하고, 끝나고는 "OB" (Officer's Bar)에 가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재밌었다.ㅋㅋㅋ몇 년간 크루즈에서 살면서 거의 모든 대륙의 해안을 여행한 사람들도 있다! 오.. 이런 직업, 이런 삶도 있구나...
여태 학교만 다니던 내게 엄청난 신세계였다. 나는 배에서 일하는 걸 오래 할 생각이 없지만, 룸메이트 없이 살 수 있거나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여행하고 피아노 치며 돈 버는 삶, why not? 꽤 괜찮을 것 같다.



2015/4/30 목요일
지금까지 배에 탑승한 지 약 24시간이 지났는데, 내가 길치인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오늘 아침에 배를 돌아다녀 보았는데도 여전히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ㅠㅠ 같은 것 같지만 서로 다른 장소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너무 많아!!!! 나는 여기저기 헤매느라 바쁜데, 새로운 친구들은 숙달된 듯이 잘만 다닌다. 나 진짜 바본가? ㅠㅠㅠ

자유시간에는 좁아터진 선실을 나와 지금처럼 한적한 라운지에 있어야겠다. 바다뷰 도서관에 앉아 있다. 히히. 좋다. 거의 모든 승객들은 흰머리 노인들이고, 나는 배 전체에서 유일한 코리안걸인 듯하다.
직원 중에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엄청 많은데 그들이 나를 보며 '저 동양애는 왜 여기에 있지? 뭐 하는 애지?' 하는 것 같다.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나는 피아노 치는 코리안 걸이라는 걸? ㅋㅋ 직원들 중에는 내가 굉장히 어린 편에 속하는 것 같다.

아, 그리고 "직원"들에게는 "레벨"이 있는데 - 뮤지션들은 "상위" 레벨 중 하나에 속한다.... 우리는 승객들이 가는 뷔페에서 식사할 수 있고, 룸 서비스도 무료로 주문할 수 있고, 많은 승무원들이 가지지 못하는 특권을 가진다..
반면 동남아시아 승무원들은 Officer's Bar 출입도 못하고 식사 장소 및 메뉴도 굉장히 제한적이며 일도 엄청 많이 한다. 뮤지션들은 하루에 일하는(연주하는) 시간이 많으면 4-5시간 정도에 나머지 시간은 자유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살 수밖에 없는 포지션이다. 괜스레 미안해진다.


배에 600명 이상의 승무원이 있으니 모든 승무원이 같은 혜택을 누리기 어렵다는 건 이해하지만, 계급제도처럼 느껴지는 시스템은.. 상당히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ㅠㅠ



같은 날 오후 5시 작성:
오늘은 연주가 없다는 사실을 방금 알았다!
공연이 없다! 하지만 페이는 있다!!ㅋㅋㅋㅋ 여태 계속 sea day 여서 아직 경치를 본 건 없다. 창 밖으로 본 것은 바다와 안개 낀 하늘뿐인데, 이것도 나름 멋있지만 빨리 멋있는 거 보고 싶다!!
멀미 괜찮겠냐고 걱정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배의 움직임이 느껴지긴 한다.ㅋㅋ 나는 괜찮지만 예민한 사람이라면 멀미할 수도????
오늘도 배를 거닐다 길을 잃어서 어쩌다 보니 데크를 걷게 됐는데 바다 위에 무지개가 뜨면 엄청 이쁘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연 무지개를 볼 수 있을까...?????

연주 없는 오늘의 계획은: 잠시 책을 읽고 저녁을 먹고, 동료 뮤지션들이 5시간 동안 재즈 연주 하는 라운지에 앉아서 연주를 들을 예정이다.ㅋㅋㅋㅋ
어휴, 5세트 연주라니, 내가 그 재즈팀 소속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새로운 방으로 짐 옮기고, 9시에 미팅 참석하고..
계속 자유시간을 만끽해야지 ㅋㅋㅋ
아! 앞으로 3달간은 한국어 쓸 일이 거의 없겠다! 역대급 장기간이군 ㅋㅋㅋ

매일 50분 x 5세트 연주하던 재즈 트리오 팀 동료들 ㅋㅋㅋ 다들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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