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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람 Sep 04. 2023

여자인 내가 하는 축구, 사랑하는 축구.

이유가 붙으면 사랑이 아니랬지만,

축구는 내게 이유 있는 사랑이며

이유 없는 사랑이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축구를 좋아하는가'하고

물어올 때마다

곰곰이 내가 축구에 빠지게 된 계기를

돌아보았는데

좋아한 햇수만큼 방대해져 버린 내 일기를

단번에 생각해 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축구라는 스포츠에 이토록 깊게 빠지게 된 매일을 써 보고 싶어졌다.


1. 운동선수가 하고 싶은 어린이

어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줏대가 없는 사람이었다. 왼손잡이지만  라켓을 쥐어주는 대로 오른손으로 배운 덕에 뜻하지 않은 스포츠 한정 오른손잡이었고, 집안 대대로 왼발잡이었지만 처음 공 차는 법을 배울 때 오른발로 배워서 발도 학습된 오른발잡이이다.

 축구를 시작한 계기는 깜찍하기 그지없다. 옆집 살던 첫사랑이 축구를 좋아했고, 그 아이는 축구를 가르치는데 열정적이었다. 나는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그 집에 드나들었고, 축구를 함께 하며 지냈다.

엉성한 축구 기본기는 그와 함께할 때 많이 늘었지 싶다. 패스는 인사이드, 킥은 인스텝으로, 몸싸움은 거침없이 슈팅은 자신 있게. 그때 축구의 재미를 알아서 막연히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발야구할 때마다 아이들이 '네가 공을 찰 때마다 기대가 많이 돼.'라고 말해주는 것도 내가 인정받는 기분이라 행복했다. 다니는 학교에는 축구부가 없다는 상황에 축구는 글렀다 싶었다. 한 번은 아버지께 '축구선수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가 '100미터는 10초 안에 뛰어야 선수할 수 있다'라고 쐐기를 박힌 바람에 열등감으로 더 이상 운동선수는 못하겠다 싶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뭐가 좋은 지도, 뭐가 싫은 지도 구분할 줄 몰랐기에 남들이 하지 말라는 것은 무작정 안 해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살았던 것 같다.


2. 체육교육과를 오다.

체육교육과를 오게 되었다. 결과는 대대만족.

이 학과에 있으면서 4년 내내 행복했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란 스포츠라고 깨닫게 되어 몰입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그토록 꿈꾸던 선수생활(아마추어긴 하지만)을 시작했다. 어느 한 종목이나 똑바로 하라는 잡음도 있었지만, 좋아서 하는 운동에 그런 건 없다. 끌리는 운동을 지칠 때까지 신나게 하는 것. 내 삶이었고 낙이었다. 운동만 해도 졸업 조건이 채워진다니, 다양하게 해 보고 싶은 나에게 최고의 조건이자 이유였다. 같은 팀의 선수였던 체육교육과 학우들이랑 유독 든든한 관계를 맺을 수 있던 것도 모두 운동 덕분이었지.

 

축구도 내가 대학시절 선수로 뛴 여러 스포츠 중 한 종목이었다. 이 학교에 여자 축구부가 있다는 사실은 입학 전, 대학 소개글이 올라올 때부터 알고 반드시 들어가겠노라 다짐하던 차였다. 선배님은 고맙게도 입단 제의를 해 주셨고, 나는 기다린 티를 내지 않으려 담담한 척을 하며 그 팀에 들어갔다.

  첫 해는 막내로서 경력은 적지만 열정은 인정받았다. 파주 NFC에서 열린 축구대회에서 나는 대부분의 경기에서 다양한 포지션의 교체선수로 폭넓게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 팀의 연습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기에, 다소 중구난방의 나였지만 부지런히 뛰어다니면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한 넓이의 경기장이라 다채로운(?) 기용을 즐길 수 있었다. 멋진 언니들의 하드 캐리와 함께한 동기 선수들과의 협업으로 준우승을 했다.

 두 번째 해는 자처한 축구부 주장으로 출전한 경기였는데 선수 모집과 훈련의 어려움, 학생회 활동도 겸임했기 때문에 많이 지쳤다. 겨우겨우 빌어야 연습에 한두 번 나올까 말까 하는 팀원들, 대거 은퇴해 버린 작년 선배들, 골키퍼는 아예 선수 모집조차 되지 않아, 내가 골키퍼 장갑을 껴야 했다.

이때 축구에 큰 아쉬움을 느꼈다. 몸과 마음이 힘든 상태에서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빌고 빌어야 겨우 한 게임 만들어 갈 수 있다니, 비참했다. 더군다나 포지션도 내가 좋아하는 포지션이 아니라서 재미를 잘 못 느꼈다. 가슴 터지도록 뛰어다니길 좋아해서 축구가 좋은데. 어쩌면 가장 믿음이 필요한 자리에서 묵묵히 팀원들을 지지하라는 주장의 가장 멋진 역할이었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무겁기만 한 자리였다.

 대회는 용케 나갔다. 교체 선수도 없이 발톱이 빠져라 뛰고 여러 군데 다친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대회 기간 중 의무 팀 지원을 받았는데 그분들이 선수 보호 차원에서 기권패하는 게 어떻나 물었다. 즐겁자고 하는 축구에서 건강을 잃어가며 경기를 뛰고 싶지 않았다. 기권 카드를 꺼내려고 하는 차에 '여기까지 왔는데 기권패하고 싶지 않다. 끝까지 경기 뛰게 해 달라.'라고 바라는 팀원들 앞에서 나는 그리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경기를 진행했다. 우리는 졌다. 마지막 경기도 져서 작년과는 달리 성적도 내지 못했지만 어쩐지 마음은 더 뜨겁고 아픈 대회였다. 축구 대회를 나가고 싶지 않아 졌다. 남자팀과 운영 갈등으로 축구 동아리에 환멸도 느꼈다.

 다음 해에는 나는 축구를 안 하려고 다짐했다. 적당히 동아리 훈련 정도만 돕고 은퇴 선언을 하며 대회 출전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배드민턴 대회에서 다른 학교 친구를 사귀었다. 예전부터 내 배드민턴 경기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올해에는 인사를 하려고 용기를 내줬다. 그 친구는 축구를 좋아한단다. 나랑 비슷하게 축구 동아리 주장도 맡았다. 배드민턴에서 만난 것처럼 축구에서도 한번 더 나를 만나고 싶다 했다. 대회란 성적을 내야 하는 부담스러운 존재, 상대 팀은 오로지 나의 승패를 갈라줄 악역으로 생각하던 내게 처음으로 대회와 교류의 즐거움을 알려준 그 친구 덕에 다시 축구를 하고 싶어졌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친구는 대회 몇 달 전 부상으로 대회 출전은 하지 못하고 나는 세 번째 출전을 했다.

 그 대회에서 축구와 사랑에 빠졌다. 조직력은 부족한 점이 여전히 많았지만 그래도 대회에서만큼은 여느 프로팀 못지않은 단합을 보여주는 아이들 덕분에 행복했다. 공격수로 뛸 수 있어 골도 넣고 즐거웠다. 거친 경기 후에 진심으로 사과하는 상대팀, 서로의 실력을 칭찬하는 그 자리에서 축구가 주는 행복을 깊이 느꼈다.


 이 대회 후로 나는 축구를 잘하고 싶어졌다. 부상으로 한창 열정이 불타올라도 영상을 보는 정도로만 만족해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축구를 공부하고 하면 정말 재밌는 거구나. 숨이 차게 뛰는 재미만 있는 게 아니라 한 골을 위해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름다운 거구나. 움직임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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