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를 떠나며....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6편 Taipei-27)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Taipei



27. 타이베이를 떠나며....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 빈 손으로 왔고 죽어서 떠날 때도 결국은 빈 손으로 간다는 말이다. 세상 사는 동안 온갖 권세와 재물, 영화를 누렸어도 죽을 때는 결국 그것들 중 단 하나도 움켜쥐고 가지 못하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니 너무도 맞는 말인 셈이다.


베이징 부임 후 채 2년도 안된 시점인 2006년 말에 갑자기 대만 법인 발령을 받아 중국 본사 사장님께 언제까지 가야 하느냐고 문의드렸더니 사장님 말씀이 "네가 마누라가 있냐 애가 있냐? 혼자 사는 놈이 베이징에 올 때 그랬던 것처럼 괴나리봇짐 몇 개 싸가지고 바로 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 것 같은데 그 사이 2년 여의 시간이 훌쩍 흘러 버렸고 나는 2008년 말 또다시 갑작스러운 인사 발령을 받고 타이베이를 떠나서 이제는 또 홍콩으로 가게 되었다.


사실 다른 주재원 경우 통상 컨테이너로 국가 간 이삿짐을 옮겼던 것과 다르게, 실제 나는 사장님 말씀대로 베이징에 부임할 때 달랑 손가방 3개만 갖고 부임했다. 그것이 나의 이삿짐의 전부였다. 그런데 베이징에 올 때만 그랬던 것도 아니고 그 이전에 토론토나 파리를 떠날 때도 내 이삿짐은 손에 든 가방들 2~3개가 전부였다. '공수래공수거'까지는 아니었지만 거의 그에 준하는 수준이었던 셈이다.


사진) 베이징을 떠나 타이베이로 출국하기 전날 현관 앞에 놓은 이삿짐 사진. 이 가방 3개가 내 이삿짐 전부였다 (2007. 1월).


그런데 타이베이를 떠날 때도 출국 전날 짐을 다 꾸려보니 역시 손가방 3개가 넘지를 않았다. 이번에도 또다시 손가방 3개의 이삿짐으로 홍콩에 부임하게 된 셈이다. 그런데 출국 전날 그 이삿짐을 보다 보니 좀 묘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전 근무지인 베이징 근무 기간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경험했던 것처럼, 타이베이에서도 약 2년간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체험했는데, 타이베이 이전에 근무했던 파리, 토론토, 베이징을 떠날 때처럼 타이베이를 떠날 때도 내 이삿짐은 변함없이 항상 괴나리봇짐 3개뿐이라는 것이 좀 색다르게 느껴졌다. 변함없는 3개의 가방을 보면서 나는 지난 2년여간 과연 타이베이에서 무엇을 하며 인생의 귀한 시간을 소비했던 것일까 하는 자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고, 출근하고, 식사하고, 일 하고, 술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잠자고.... 그저 그런 삶을 반복하면서 2살 더 나이 들은 것 이외에 타이베이에 2년간 거주하면서 진짜 난 도대체 뭘 했고, 무슨 시간을 보냈던 것인지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런 궁금증이 결국 홍콩 법인 근무 5년 반 뒤에는 늦게나마 사표를 제출하는 것으로 이어졌지만, 타이베이를 떠날 때만 해도 사표는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고, 그저 내가 뭘 하고 살고 있는지 막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던 그러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지나고 보니 조금 더 일찍 그러한 의문이 들었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좀 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당시 회사의 관행은 통상 한 법인에 부임하면 약 4~5년은 근무하다 본사로 귀임하거나 또는 다른 법인으로 전근되는 것이었는데, 내 경우는 베이징에 이어서 연속으로 2년도 채우고 역내 타 법인으로 전근된 셈이었다. 결국 조금 정이 들만 하면 바로 그 도시를 떠나야 했던 것이다.


사실 대만에는 대만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부임했다. 하지만 대만 타이베이에 근무하다 보니 유난히도 정이 많이 가는 곳이 타이베이였고 대만이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는 지금도 역시 적절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여하튼 이상하게 그 이전이나 이후에 근무했던 다른 도시들보다는 유독 타이베이에는 많이 끌렸다.


뭐라 말로는 표현하기 애매한 독특한 멋과 맛이 있는 곳이 타이베이라 그 도시의 공간에도 많이 끌렸지만, 무엇보다도 그 공간을 만들어낸 대만인들의 멋과 그들만의 매력에 보다 더 많이 끌렸던 것 아닌지 모르겠다.


중국인이지만 대다수가 기후가 온화한 중국 남부의 푸젠성 출신이고, 또 대만을 한때 지배했던 유럽의 흔적도 혼혈과 문화 유적을 통해 대만에 분명히 남아 있으며, 일본 통치를 무려 반세기나 받았던 만큼 일본 문화의 영향도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이 뒤섞여서 대만과 대만인만의 독특한 멋과 매력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바로 그 멋과 매력에 흠뻑 빠졌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만나면 반드시 헤어짐도 있다(會者定離)"는 말처럼 내게 할애된 대만에서의 시간은 2년여뿐이었고, 내 의지나 아쉬움과는 관계없이 이제는 대만에서의 시간을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


그런데 꽤나 아이러니하게도 대만을 떠나기 직전 반년 여간 고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새롭게 마련한 건물에 마침내 입주하게 되는 첫날이 내가 대만을 떠나야 하는 날이었다. 반년 여간 고생해서 마련한 새 사무실에서는 하루도 제대로 근무해 보지 못했던 셈이다.

새로운 사무실에서 많은 것들을 이루어갈 꿈도 꾸었고 나름 미래에 대한 기대도 많았는데, 그 모든 것을 뒤로 남겨 두고 홍콩으로 떠나야 했다. 대만에 올 때처럼 괴나리봇짐 3개만 달랑 들고....


마지막 출근날이었던 그날 갑작스러운 전근 소식을 듣고서 일부 직원들이 기념사진이라도 찍자고 내 방으로 찾아와서 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데 아래 사진이 그 사진이다. 홍콩에서처럼 대만에서도 직장인들 대부분은 영문 이름을 사용했는데, 사진 속 직원들의 영문 이름은 지금도 명확히 기억난다.


Christina, Betty, Judy, Fiona, Eden, Daisy, Clare, Amy.... 12년 전 같이 근무했던 대만의 추억과 함께 기억 속에 짙게 남아 있는 전우이자 동료들 모습인데 이 사진이 대만 법인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으로 이 사진을 찍은 직후 점심조차도 먹지 못하고 급하게 공항으로 이동해서 홍콩행 항공기에 탑승했다.


사진) 대만 법인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 2008년 12. 10일 오전 9시 34분에 찍은 사진.




'LA International Airport'라는 오래된 미국 노래가 있다. Los Angeles 공항을 떠나면서 연인과 이별을 하는 슬픔을 노래한 곡이다. 그런데 이 노래뿐 아니라 기차역이나 공항 같은 곳은 묘하게도 이별과 헤어짐 등의 감정과 연관되어서 떠오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전 세계 공통된 현상인 것 같다.


내게도 타이베이 공항은 도착할 때 보다 떠날 때의 기억이 더 짙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출장 등으로 타이베이 공항을 이용하면서 입국했던 횟수와 출국했던 횟수가 당연히 같을 텐데 이상하게도 출국 시의 기억이 더 많고 또 진하게 남아 있다.


아래 사진은 타이베이 공항 대합실 사진인데, 대만 법인을 떠날 당시의 사진은 아니고, 약 2년 뒤 대만에 출장 갔을 때 찍은 사진이지만, 바로 이러한 모습의 대합실에 잠시 앉아 있다 2년여의 대만 법인 근무를 마감하고 홍콩으로 떠났다.


사진) 타이베이 공항 2 터미널 내 대합실 (2010. 9월).


거리의 작고 아름다운 공원,

집 앞 단골 세탁소 사장님의 미소,

수많은 오토바이 행렬,

출근길 마주치던 교복 입은 학생들,

경주관, 제주관의 맛있는 한국음식,

고려옥의 칼칼한 광어 조림,

비좁은 미로 같은 광화 상장 내부,

얼음과 물을 타서 마시던 금문고량주,

휴일 텅 빈 사무실의 쓸쓸한 공간,

도로 위로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

아파트의 회랑, 아름다운 정원,

거리의 아름다운 여인들,

시내 오래된 골목길과 주택들,

사무실에서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

소풍 같았던 체육대회,

남국적 정서를 가득 품은 대만어,

그리고 떠나던 날의 괴나리봇짐 3개....


이 모든 과거의 기억이 한 편의 오래된 영화처럼 남아 있는 타이베이와 대만이 그립다....


(대만 정취가 듬뿍 담긴 노래 방랑 인생 放浪人生, 04:17)

https://youtu.be/1FZJrUZla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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