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 기억에 남는 단편들 (3-3)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6편 Taipei-26)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Taipei



26. 타이베이, 기억에 남는 단편들 (3-3)


전편 "25. 타이베이, 또 기억에 남는 단편들 (3-2)"에서 이어짐......



11. 한자 문화권의 성(姓)


중국인뿐 아니라 한국인, 일본인, 베트남인까지도 이름에 있어 한 가지의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한자로 된 성(姓)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林'이라는 성은 한국에서는 '임'으로 발음되며, 영어로 표기하면 'Im' 또는 'Lim'으로 적는다. 하지만 같은 성이 일본에서는 'Hayashi' 중국 표준어 발음으로는 'Lin', 민난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Lim', 광둥어를 사용하는 곳에서는 'Lam'으로 각각 지역 언어의 발음에 따라 다르게 표기된다.


'陳'이라는 성도 마찬가지인데, 한국에서는 '진(Jin)'으로 발음되지만, 중국 표준어로는 'Chen', 광둥어로는 'Chan', 민난어로는 'Tan, Tang, Tung, Chin, Tjhin'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발음된다. 프랑스 파리 차이나타운에 가면 불어로 Tang Frères(탕 씨 형제들)'라는 대형 중국인 마트가 있고 간판 바로 옆에는 한자로 '陳氏兄弟'라 적혀 있는데, 여기서 '陳'이라는 한자를 'Chen'이나, 'Chan'으로 발음하지 않고 'Tang'이라는 발음으로 표기한 것을 보면 그 마트의 사장 형제는 민난어를 사용하는 중국 푸젠성 출신인 것을 알 수 있다.


(파리의 Tang Frères 모습)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ang_Fr%C3%A8res_24_August_2012.jpg


대만 경우 이제는 중국 표준어와 동일한 방식으로 대부분의 성을 발음하고 표기하지만 일부 여전히 중국 표준어와는 좀 다르게 표기되는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한국의 '허'씨에 해당되는 '許'가 중국 표준어로는 'Xu'로 표기되고 있지만, 대만에서는 'Hsu'로 표기된다. 중국에 매우 흔한 '張'씨도 표준어로는 'Zhang'으로 표기되지만, 대만에서는 이것도 역시 'Chang'으로 표기했다.


사진) 대만 법인 직원들의 영어 성(姓) 표기법


그런데 이 '張'씨는 푸젠성의 민난어로는 'Teo'로 발음되어 표준어 발음과 꽤 다르고 오히려 영어 이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본사에서 근무할 때 싱가포르에서 온 한족 직원 중에 이 'Teo'라는 성을 가진 직원이 있어서 참 특이한 성을 가진 직원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의 '장'씨와 같은 성의 푸젠성 지역 발음이란 것을 알았다. 싱가포르의 한족 주민들은 대부분 푸젠성 출신이었기 때문에 과거에는 싱가포르에서도 푸젠성의 민난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한다.

홍콩 법인에 근무할 때는 'Ng'란 성을 가진 직원들이 있어,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발음해야 하나 한참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성은 한국의 '오(吳)'씨와 같은 성이었다. 이 성은 중국 표준어로는 'Wu'로 발음이 되지만 광둥어로는 다르게 발음되기 때문에 광둥어식 발음에 맞게 'Ng'라 표기된 것이다. 이 발음은 아래 링크에서 들어보면 느끼겠지만 마치 코 푸는 소리처럼 '응' 비슷하게 들리는데 한국인으로서는 발음하기가 꽤 어렵다.


('응'처럼 들리는 'Ng'의 발음)

https://fanyi.baidu.com/translate?aldtype=16047&query=%E5%90%B3&keyfrom=baidu&smartresult=dict&lang=yue2zh#yue/zh/%E5%90%B3


베트남은 현재는 한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가 체계화한 알파벳 문자로 자신들의 언어를 적고 또 표현한다. 하지만 베트남어 어휘 역시 원래는 한자에서 온 것들이 꽤 많았다. 베트남인의 성 또한 한자에서 온 것인데 베트남인 성의 약 40%를 점유하고 있을 정도로 흔하다는 'Nguyễn'이라는 성은 원래 한자 '阮(완)'으로 표기되었던 성이다.

(Nguyễn 발음)

https://translate.google.co.kr/?hl=ko#view=home&op=translate&sl=vi&tl=en&text=nguy%E1%BB%85n


또 베트남 성의 'Hoang'은 '黄(황)'이며, 유명한 당구 선수 덕분에 한국에도 잘 알려지게 된 베트남 성 'Trần'은 바로 한국에도 적지 않은 '陳'씨를 베트남어로 발음한 것이다.


(Trần 발음)

https://translate.google.co.kr/?hl=ko#view=home&op=translate&sl=vi&tl=en&text=Tr%E1%BA%A7n


그런데 이처럼 원래는 같은 이름이지만 지역에 따라 발음이 바뀌게 되는 현상은 동아시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고 유럽에도 역시 있어서, 독일에서는 '칼(Karl)'이라 불리는 이름이 인근 프랑스에서는 '샤를르(Charles)', 영국에서는 '찰스(Charles)', 스페인에서는 또 '카를로스(Carlos)'로 바뀌어 불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장(Jean)'이라고 불리는 이름은 영국에서는 '존(John)'으로, 독일에서는 'Johan(요한)', 이태리에서는 '지오바니(Giovanni)'로, 또 러시아에서는 '이반(Ivan)'으로 각각 다르게 불린다. 각 언어별 발음에 적합하게 철자가 변모한 셈이다.


내 성(姓) '이(李)'도 영문으로 'Lee'로 표기하는데, 같은 성이 중국 표준어로는 'Li', 광둥어로는 'Lei', 베트남어로는 'Ly', 인도네시아어로는 'Lie'로 각각 발음되고 표기된다. 나와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 한번 가보지도 못했던 저 멀리 동남아 국가에도 허다하게 존재하고 있는 현실인데 이러한 현실에 다소 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 다.



12. 장학금 준 사람이 오히려 미안할 정도


타이베이에 거주하면서 상대방 측의 반응이 너무 정중해서 선의를 베풀고도 오히려 괜스레 미안한 생각까지 좀 들었던 경우가 있었다. 바로 대만의 대학교 학생들에게 개인적으로 장학금을 전달했을 때였다.


나는 일정액을 정해 놓고 내가 근무하고 있는 국가에 있는 학교 또는 기관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전달하거나 기증을 하기도 했었다. 내가 해당 국가에서 영업하면서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고 있으니 결과적으로는 그 국가의 국민들이 내게 월급을 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내게 월급을 주는 그 사회에 어느 정도는 다시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단, 기증은 항상 익명으로 했다. 괜스레 법인 영업에 활용한다는 그런 오해는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대만에 근무하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에게 도움이 되는 용도로 사용해 달라고 법인 인사과장 통해 몇 차례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런데 처음 그런 장학금을 전달한 후 얼마쯤 지나고 나서 인사과장이 묵직한 서류 봉투를 하나 들고 왔다. 그러면서 건네주는데 그 안을 보니 내가 전달한 장학금 혜택을 받은 2 명의 대학생들 관련 자료가 수북하게 들어 있었다.


그 자료 중에는, 선발된 이유, 전 학년 전과목 성적, 어려운 가정 형편 관련 증명서, 자필로 작성된 가족관계 현황, 자기 소개서, 집 주소,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등 수혜자에 대한 거의 모든 개인 정보가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너무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게다가 내가 한국인이라 그랬는지 그런 조건을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장학금 수혜자 두 명은 한국어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서 선발됐고 그들의 한국어 성적은 각별하게 눈에 띄는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한국인이 제공한 장학금이니 한국에 호감을 갖고 있는 학생 중에서 선발했다는 의미였던 셈이다.


물론 당장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내가 전달한 장학금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봉투 안의 그 모든 자료를 보다 보니 괜스레 어려운 학생들에게 결과적으로 내가 너무 많은 일을 시킨 것 아닌가 하는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내게 전달된 서류들이 너무나도 자세하고 종류도 많았다는 의미다.


하지만 인사과장 말에 의하면 학교 입장에서는 아마도 모든 장학금에 적용되는 그 학교의 내부 규정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규정을 무시할 수 없어서 그렇게 많은 서류를 준비했을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누군가 전달한 익명의 장학금이라도 너무도 귀하고 감사하게 간주하고 있다는 대학과 학생들의 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후 홍콩에서도 역시 동일한 이유로 모 대학에 개인적으로 장학금을 제공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홍콩에서의 경우는 대만에서와는 달라 그저 장학금 수령했다는 증빙만 받았지 그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받지를 못했다. 물론 당연히 다른 정보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대만에서의 경우와 차이가 있었다는 말이다.

사진) 장학금 수혜자 관련 서류 표지. 별첨에 수많은 자료가 붙어 있었다. (2008. 10월)


대만에서 장학금을 받았던 학생들이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내게 전달된 신청서에 스스로 기록한 내용처럼 그 당시에는 매우 힘든 여건에서 어렵게 공부했을 그 대학생들도 12여 년이 흘러간 이제는 이미 3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을 것인데 모두 각 분야에서 잘 자리 잡고 좀 더 여유 있는 행복한 삶을 즐기고 있기를 기대한다.



13. 대만섬 = 보물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등과 함께 세계 4 대 박물관 중의 하나로 꼽히는 박물관이 아시아에도 있는데 바로 '고궁 박물관(故宮博物院)'이라 불리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는 수천 년 역사를 가진 고대 유물이나 문화재 등 중국의 온갖 희귀한 보물들이 수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궁 박물관'이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박물관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개가 존재한다. 중국의 베이징 자금성에 하나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대만 타이베이에 있다. 그런데 세계 4대 박물관 중 하나로 간주되는 고궁 박물관은 의외로 베이징에 있는 박물관이 아니고 타이베이에 있는 것이었다. 장개석이 중국 본토에서 공산당에 패해 대만으로 도피할 때 자금성 등 중국 도처에 있던 보물 중 특별히 귀중한 것들은 거의 모두 대만으로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장개석은 자신과 휘하 군사들이 목숨까지 위협받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그 많은 보물들을 힘들게 가져온 셈인데 그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가져온 보물의 양도 너무도 많아 그 당시 대만으로 가져온 중국의 보물이 무려 수십만 점에 달한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처럼 그 수가 너무 많다 보니 그 보물 중 일부는 고궁박물관뿐 아니라 대만섬 곳곳의 산속 비밀스러운 장소 3~4개소에 분산해서 보관을 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목숨을 건지기도 긴박한 상황에서 엄청난 양의 보물을 굳이 챙겨서 가지고 온 것인데, 장개석의 개인적 욕심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대만으로 가져온 덕분에 문화 대혁명 기간 중국의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들이 무참히 훼손되던 시절에도 대만으로 반출된 이 보물들만은 아무런 탈 없이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장개석이 가져온 보물은 무엇일까?)

https://news.joins.com/article/23397216

(문화 대혁명 당시 파괴된 문화재)

https://m.fmkorea.com/best/1714357283


언제가 한국 본사에서 그룹 임원이 모 대학의 교수와 함께 출장을 왔는데, 특이하게도 이분들의 대만 일정에는 고궁 박물관과의 미팅도 포함되어 있어 함께 박문관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미팅 도중 그 교수가 갑자기 어떤 특정 보물을 볼 수 없겠느냐고 박물관 측 인력에게 간청하다시피 부탁을 했다. 고궁 박물관이 좀처럼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소장만 하고 있는 보물도 꽤 많이 있다는데 그런 보물 중 하나였던 같았다.


박물관 측은 한동안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국 승낙을 하고서교수와 함께 한동안 어딘가로 갔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회의실로 돌아오는 그 교수의 얼굴을 보니 방금 전에 보던 얼굴과는 너무도 다르게 마치 사춘기 시절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남학생처럼 얼굴이 온통 붉게 상기되어 있고 만면에는 화색이 가득했다. 그 보물을 직접 본 것이 그에게는 그렇게 흥분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보물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그저 잠시 보고만 왔는데도 그렇게 흥분하고 감동하는 모습이 나 같은 문외한으로서는 좀처럼 이해가 안 됐는데 그런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분들에게는 마음속에 두고 있던 역사적인 보물을 직접 보는 것이 그렇게 흥분되는 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2년여간 대만에 근무를 하면서도 그 교수와 함께 어쩔 수 없이 박물관을 방문했던 그날 외에는 단 한 번도 박물관을 방문했던 적이 없었다. 그만큼 보물과 문화재 등에 무관심했던 셈인데, 막상 대만을 떠나고 나서 우연히 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들 사진을 보니 참 대단한 보물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보물이 가까이 있던 보물섬 대만에 거주할 때 왜 좀 더 관심을 갖고 가 보지 못했는지 후회가 되기도 했다.


(고궁 박물관 소장품)

https://erisgoesto.com/2017/03/30/historical-treasures-national-palace-museum-taipei/



14. 두 여인에게서 받은 두 번의 충격


Jackie라는 이름을 가진 관계사 직원이 있었다. 어릴 때 일찍 미국에 유학을 다녀와서 영어도 꽤 자연스럽고 멋지게 구사하던 직원이었는데 업무 관계로 회사에서 종종 만나곤 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워낙에 미모의 여성이었던지라 평소 이성적으로도 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런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단 둘이 만났다거나 데이트를 했다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아직은 마음속으로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단계였고 따라서 어쩌면 그녀는 내가 이성적으로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내 책상 앞으로 오더니 불쑥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무심결에 그 카드를 받아서 열어 보니 청첩장이었다. 나는 순간 잠시 놀라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한마디 했는데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너는 한 번도 내게 너의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지 않으냐?" 같은 그런 의미의 영어였다.


결국 그녀도 내 연심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 같고,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기를 한동안 기다렸다는 의미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속 마음을 단 한 번도 표현했던 적이 없었고 단둘이 개인적으로 만났던 적도 전혀 없었는데, 그날 그녀가 자신의 청첩장을 주면서 그런 말을 직설적으로 내 면전에서 해서 사실 많이 놀랐었다.


결혼 이후 그녀는 남편과 함께 외국으로 이주하면서 회사는 그만두었고 이후 다시는 만날 기회는 없었다. 결국 그렇게 미련하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그녀는 떠나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너무도 열성적으로 업무를 하던 능력 있던 직원이었던 만큼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서 축복 속에 잘 살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녀가 내가 충격을 받았던 첫 번째 대만 여인이었다.


거래선의 직원 중에 유 씨 성을 가진 여인이 있었다. 그녀도 역시 업무적으로 관계가 있어서 종종 만나기도 했는데 그녀 역시 꽤 미모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대만섬의 중부에 있는 '장화(彰化)'라는 도시가 고향이었는데 가족 모두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주말에는 꼭 고향으로 가서 교회에서 어려운 이웃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내 경우 직접 봉사활동에 참여하지는 못해도 전술한 것처럼 내가 근무하는 국가의 기관이나 학교에 장학금 등을 기증하기도 했기 때문에 이왕이면 그녀가 봉사활동을 하는 그 교회에도 개인적으로 일정액을 기증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면서도 수락했고 나는 결국 그녀를 통해 일정액을 기증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갑자기 봉사 활동한다는 핑계로 돈을 주어서 자신의 환심을 사고 결국 자신과 사귀어 보려는 의도 아니었냐며, 자신의 진정한 봉사활동을 그런 부정한 재물로 호도하거나 이용하지 말라고 버럭 화를 내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 돈을 받을 때는 전혀 아무런 말이 없다가 갑자기 사람이 그렇게 돌변하면서 화를 내니 나로서는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별다른 말도 못 하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며칠 후 그녀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사실 자신은 정신적으로 조울증 같은 질병을 꽤 오래전부터 앓고 있어서 약도 먹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약을 정기적으로 먹어도 간혹 증상이 심해져서 감정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내게 화를 낸 날도 바로 그런 날이었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관심 있는 것도 사실이며, 따라서 이왕이면 관심 있는 사람이 하는 좋은 일에 기증을 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단 그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 오로지 그녀의 환심만을 사기 위해 그랬던 것만은 결단코 아니라고 답을 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인지 이후 그녀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한편 나는 갑작스러운 인사 발령으로 대만을 떠나 홍콩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홍콩에서 5년 반 근무한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잘 사용하지도 않아 그저 약자로 된 이름만 남아있던 Linkedin에 보니 그녀로부터 짧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내가 과거에 대만 법인에 근무하던 그 사람이 맞냐고 묻는 내용이었는데 맞다고 답했더니 자신은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하고 있으며 병세도 좋아졌고 결혼해서 아이도 낳아 잘 기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내가 대만을 떠난 지 이미 10여 년이 지나서 받은 그녀의 첫 소식이었는데, 나 역시 최근 내 근황을 알려줬고 이후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마 심하게 화낼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토록 불 같이 내게 화를 냈던 것이 오랜 기간 마음에 걸려 있어 망설이다 결국 연락을 해 왔던 것 같은데 어쨌든 이것이 10년 만에 내가 그녀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녀가 내가 충격을 받았던 두 번째 대만 여인이었다.


15. 덩샤오핑과 함께 중국을 지배했던 등려군


중국에 주재하기 위해 중국어를 배우기 전에는 중국 노래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중국어를 배우면서부터는 중국어에 익숙해지기 위해 중국어 노래들을 다운로드하여 갖고 다니며 틈만 나면 수시로 듣곤 했었다. 그때 가장 자주 들었던 노래들 중에는 '등려군(鄧麗君)'의 노래가 많았는데 바로 '첨밀밀(Tian Mi Mi, 甛蜜蜜)' 같은 노래였다.


첨밀밀은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같은 이름의 제목으로 만들어진 홍콩 영화도 있었는데, 한국에도 1997년 개봉돼 인기리에 상영됐던 영화다. 이 영화에는 등려군의 열성팬인 주인공이 거리에서 우연히 등려군을 만나 옷에 사인을 받는 장면도 나오며, 영화 내내 첨밀밀뿐 아니라 등려군의 다른 감미로운 노래들도 꾸준히 등장한다.


(영화 첨밀밀에서 주인공이 등려군 만나는 장면, 03:21)

https://www.youtube.com/watch?v=cfGxoeM3WTE

(영화 첨밀밀 소개 블로그)

https://blog.naver.com/writer127/222075836298


등려군은 1953년 대만에서 태어나 1995년 42살 아직은 한참 나이에 사망한 대만의 여가수다. 요즘에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녀는 한때 중화권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동남아 등에서 매우 유명한 가수였다.


한편 그녀의 부친은 중국 허베이성 출신 국민당 군인이었고 모친은 중국 산둥성 출신이었다. 두 사람 모두 중국 본토의 북방 지역 출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녀 역시 대만에서 태어났지만 결국은 북방계 사람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녀는 북방의 중국 표준어 외에도 중국 남부 지역의 다양한 언어에도 능통했었다. 북방계 대만인들 중에는 대만의 민난어도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꽤 많은데 그녀는 민난어뿐 아니라, 인근 광둥성의 광둥어도 능숙하게 구사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중화권을 넘어 일본어와 인도네시아어까지도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또 사망 직전 사귀던 남자 친구가 프랑스인이었을 만큼 불어도 어느 정도 구사했다고 하니, 결국 등려군은 1) 중국어, 2) 민난어, 3) 광둥어, 4) 일본어, 5) 인도네시아어, 6) 영어, 7) 불어 등 최소한 7개 국어를 구사했던 셈이다. 노래뿐 아니라 언어에도 대단한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요즘 한국의 K-Pop 가수들이 동남아나 일본, 중국에서도 인기가 있지만 현지어로 노래를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을 보면 등려군이 다양한 언어들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나름 꽤 특이한 일이었다.


※ 등려군이 다양한 언어로 부른 노래들

(인도네시아어)

https://www.youtube.com/watch?v=oXmLYOpMXBM

(광둥어)

https://www.youtube.com/watch?v=DaDKS0FE2RE

(민난어)

https://www.youtube.com/watch?v=YlvwjH0Swzo

(영어)

https://www.youtube.com/watch?v=fxM7SKGKq1g

(일본어)

https://www.youtube.com/watch?v=AGoeRQjtsa0


등려군은 또 동남아 민요를 중화권의 최고 연가로 만들기도 했는데,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로도 알려진 '첨밀밀'이 바로 그 노래다. 즉 첨밀밀은 대만인이나 중국인이 작곡한 것이 아니라 'Dayung Sampan'이라고 하는 인도네시아 전통 민요에 중국어로 가사만 새로 붙인 것이었다.


그런데 'Dayung Sampan'은 "노를 저어라"라는 뜻으로써 인도네시아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을 때 부르던 노래였다고 하니 일종의 노동요였던 셈인데, 결과적으로 보면 노동요가 중화권의 최고 연가로 변모한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난 셈이다.


(인니어 노래 Dayung Sampan, 02:21)

https://www.youtube.com/watch?v=y9Ng8ptnVFE


등려군의 영문 이름은 'Teresa Teng'으로 'Teng'이라고 성을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의 영문 성은 'Deng'으로 표기한다. 따라서 얼핏 보면 두 사람 성이 다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같은 '등(鄧)'씨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중국 본토 표준어로는 '鄧'을 영문으로 'Deng'이라 표기했지만 대만에서는 'Teng'으로 표기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인근의 광둥어로는 '鄧'은 'Tang'으로 표기가 된다.


처럼 덩샤오핑과 등려군이 같은 등 씨다 보니, 등려군의 노래가 너무나도 인기가 좋았던 중국 본토에서는 재미있는 말도 생겼었는데, 바로 중국의 낮은 '늙은 덩(덩샤오핑)'이 지배하지만 중국의 밤은 '젊은 덩(등려군)'지배한다는 말이었다.


등려군의 노래는 당시 중국에서는 금지곡이었지만, 너무도 많은 중국인들이 밤만 되면 몰래 숨어서 등려군의 노래들을 애청했기에 이러한 말까지 생긴 것이었다. 등려군의 노래를 단속하는 경찰조차도 그녀의 노래를 몰래 들었고, 시진핑도 젊은 시절 그녀의 노래를 너무 자주 들어 테이프가 망가질 정도였다고 고백을 했다 하니 당시 중국에서의 그녀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이 되는 것 같다.


(중국의 밤을 지배했던 등려군)

https://news.joins.com/article/21780563


중국 본토를 빼앗기고 대만으로 도피했던 장개석은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국 본토 탈환을 위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다. 그만큼 빼앗긴 중국 본토에 대한 미련이 컸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런 꿈을 이루지 못하고 88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장개석의 중국 본토 침공 작전 '국광 계획')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060327/8289230/1


반면 생각해 보면 가수 등려군은 비록 장개석이 이 땅에서 살았던 시간의 반도 안 되는 42살의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기는 했지만, 그녀의 노래로 중국 본토에 있는 수많은 중국인들의 영혼을 빼앗아 결국에는 중국의 밤을 지배했던 셈이다. 어찌 보면 장개석이 결코 이루지 못한 간절한 꿈을 같은 국민당 군인의 딸이었던 등려군이 대신 이루어준 것은 아니었을지....


(등려군 장례식, 01:55)

https://www.youtube.com/watch?v=qCTX5236p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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