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소혜 Sep 18. 2023

여름과 함께 끝난 사랑

옥계 근무 일지 2

한 여름밤의 옥계는 젊음의 한 때를 보내는 것처럼 활기가 넘쳤다. 더위를 피해 유입된 사람들은 짧게는 삼일, 길게는 한 달 가까이 머물다 갔다. 그도 그럴 것이 텐트 하나만 있으면 바닷가 근처 솔밭에 야영하며 잠자리를 해결할 수 있었고 조금 걸어 옥계 시내로 들어오면 넉넉한 인심이 담긴 상차림과 마주할 수 있었다. 평소 연락 없던 지인들조차 옥계의 여름 동안에는 평생지기처럼 우정을 나눴다.


회사 주 업무도 잠시잠깐 리조트 고객센터가 된 듯했다. 동료들은 눈에 띄게 자리를 비웠다. 숙박을 예약해 달라, 너희 집에서 지내면 안 되냐, 텐트 칠 명당 좀 확보해 달라 등의 요구 사항을 피해 일부러 전화를 안 받았다. 아예 바닷가 가서 업무를 보기도 했다. 거래처 사람이거나 임원의 지인일 경우 소홀하게 대하는 것이 인사고과에 반영될 수도 있다고 여겼다.


삼삼오오 몰려오는 서울 사무소 직원들의 전화는 내 몫이었다. 업무적으로 연결되어 전화통화가 잦았던 무리가 있었는데 이 기회에 얼굴 보자며 여름휴가를 옥계로 정했다. 나는 동의한 적이 없는데도 어느새 그들의 휴가를 즐기는 무리 속에 들어가 있었다. 정작 얼굴을 보고 나서는 말 한마디도 섞을 수 없었다. 뭔가 모를 자신감과 생기가 넘치는 그들 앞에서 이방인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직장 내 폭력사건을 겪은 이후 회사 생활에 마음을 못 붙이고 있었던 때라 퇴근하고 나면, 주수천을 향해 난 숙소 창가에 서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것이 편했다. 누구랑 말을 섞지 않아도 되고 안 좋은 생각들은 강 줄기 위에 얹어 놓고 떠나보내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창문이 하늘과 바람, 강을 통해 마음 안으로 길을 내주니 숨통이 트였다.


내 마음이 거미줄에 엉켜 정상적인 세계로 향하지 못할 때, 휴가로 옥계를 찾은 여름 나그네들의 들뜸과 설렘이 시끄럽게 느껴졌다. 이방인이 되어 있는 상태에 서울 사무소 직원들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억지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정작 나는 옥계에 갇혀 주말에도 숙소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 여름밤의 옥계 바닷가에서 걸려 오는 잦은 호출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렸다.


석구 씨는 서울 사무소 휴가팀의 막내였다. 휴가 마지막 날 밤에 약간 취기가 도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서로 각자의 부서에서 막내였던 탓에 장보기나 뒷정리를 하면서 안면을 텄다. 왜일까 싶을 정도로 계속 나오라는 말만 했다. 그즈음 소형차를 구입한 미주가 옆에서 거들었다.


- 태워줄게 갔다 와. 혹시 너무 불편한 자리면 전화해. 데리러 갈게.


석구 씨는 바닷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주는 걱정됐던지 한참을 차 안에서 지켜보다가 차를 돌렸다.


- 무슨 일 있어요?


전화로는 막무가내로 나오라고 강요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냥 앞서 걷기에 따라 걸었다. 그의 회사 동료 무리 쪽으로 가지 않고 모래사장 쪽으로 걸어가기에 흠칫 불안한 마음에 따라 걷기를 멈췄다. 모래사장 쪽은 조명이 약했다. 밤바다의 파도가 어둠 속에서 간신히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낮동안의 미칠 정도로 파란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석구 씨는 계속 걷는 듯싶더니 모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주에게 전화를 해야 할지 석구 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 망설여졌다.


아마 밀물휩쓸렸을지도 모른다. 길 쪽에 서 있어 파도가 이곳까지 밀려올 리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석구 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옆에 앉자 그는 고개를 돌려 쳐다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나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더는 묻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왜 나오라고 했는지 별로 궁금해지지 않았다. 꽤 시간이 흐를 때까지 우리는 파도만 보고 있었다. 편하고 느슨해진 마음은 한바탕 울고 나서 개운해진 기분처럼, 몇 주간 온갖 생각이 주던 피로를 덜게 해 주었다. 두려움 지친 마음은 석구 씨와 앉아 있던 그 바다에서 만큼은 꺼내 놓을 수 있었다.


- 얘기 나누고 싶었어요. 오늘 밤만큼은 솔직해도 되잖아요.


겨우 입을 떼며 파도를 가르는 분명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 저한테 할 말이 있었던 거예요?


- 그게...... 좀 힘들어 보여서요. 사실 제가 힘들기도 하고요. 휴가는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고 싶었는데 업무의 연장처럼 옥계까지 끌려왔어요.


- 아~힘드셨겠어요. 그런데 저는 이 여름이 견딜만해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부정하고 싶었다. 석구 씨가 나에 대해서 뭔가 안다는 듯한 표현이 조금은 어리둥절했다. 회사 일로 화한 시간과 일주일간의 휴가 동안 잠깐씩 봤던 것이 전부였다. 옥계 안내와 피서지에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신경 쓰며 도왔다. 일종의 같은 회사 구성원으로서 친숙함이 쌓였던 것 지만, 함께 다니는 동안 자꾸 쳐다보는 게 불편해 선글라스를 일부러 끼기도 했다.


- 그냥 업무 때문에 통화할 때 궁금했어요. 사적인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니니까,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을 때는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걱정하기도 했고요. 옥계 날씨 물어보면 대답해 주는 방식이 저랑 비슷해 여동생과 통화하는 느낌도 들었네요. 그리고...... 친절한 사람 같아 만나 보고 싶었어요.


이상했다. 누군가에게 궁금한 사람이 될 정도로 나름의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랑을 쫓는 영혜와 진행 중인 사랑에 고민하는 미주와 살면서 그녀들의 데이트 자리에 같이 나가면 상대편도 일행을 데리고 나와 짝짓기가 될 때가 있다. 그런 자리에서도 주로 구석에 앉아 그들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가끔 그 모습도 인상적이었는지 연락처를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었지만 별로 내키지 않아 미주와 영혜 뒤로 빠졌다.


만나 보고 싶었다는 석구 씨의 말 끝이 떨렸다. 파도가 우리가 앉은 쪽으로 좀 더 가까이 밀와 신발이 조금씩 젖어갔다. 그런데 일어나자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걱정하는 미주의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무슨 말이라고 해야 할 상황이었다.

 

- 다시 볼 수 있어요?


석구 씨는 좀 더 용기를 내 파도가 저 멀리 빠졌을 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 순간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을 여는 것이 힘든, 불안한 이십 대를 보내는 나에게 그 감정은 사치스럽기보다 버거움이 더 컸다. 그냥 석구 씨처럼 마음이 노크하는 대로 문을 열고 감정을 쏟아내지 못했기에 얼음장처럼 서 있었다.


- 소혜야, 우리 왔어!


저 멀리서 미주와 영혜가 나를 큰소리로 불렀다. 친구들 곁으로 가기 위해 무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의 눈길을 쳐다보지 못한 채, 귀밑까지 벌겋게 올라오는 열기만 느껴졌다.


- 어서 가 보세요.


그가 나를 놓아줬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조금 수그린 인사를 하며 석구 씨로부터 멀어졌다.


돌아오는 차 안에 미주는 무슨 일 있었냐고 물었다. 내 표정이 어둡고 슬퍼 보인다며 영혜는 그만하라는 손짓을 했다. 숙소로 돌아올 때까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생채기가 난 마음이 아려와 진정시키는데 시간이 걸렸다.


우리에게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여름 끝자락 밤 바닷가에는  파도를 주례 삼아 사랑을 약속하는 인들을 볼 수 있다. 잠시 잠깐 모래를 쓸고 가는 파도처럼 사랑이 마음을 휩쓸고 가 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직장 내 폭력에 노출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