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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의 파라다이스 (1)

by 심심한 소녀



나른한 오후였다. 점심식사를 마친 바로 다음 시간인 체육 시간은 더욱 그랬다. 수학이나 국어와 같은 과목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나 할까. 느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시를 읊은 국어 선생님과 50분의 수업시간을 견뎠야 했다면, 아마 나는 지금쯤 고개를 땅에 박고 잠이 들었을 것이다.

중간고사와 가까워져 오는 날이라서 그런지 지난 체육 시간부터 선생님의 넓은 아량으로 우리 반은 자유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덕분에 수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은 갖가지 과목 필기 노트나 작은 요약본 교재를 가지고 나와 그늘진 의자 아래 삼삼오오 모여들어 아직 보다 못한 단원을 복습할 수 있었다. 무어라 말을 나누며 까르륵 웃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나는 햇빛이 가득 내리쬐는 운동장 앞 구령대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2학년으로 올라오면서 안타깝게도 나는 학급 내 무리 안에 속하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1학년 때 사귀었던 친구들은 2학년 반배정이 이루어지면서 각기 다른 반으로 찢어졌고, 무슨 일인지 처음으로 발을 들인 새 교실에서는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친구들과 함께 올라왔던 탓인지, 아니면 다들 생존 친화력이 좋은 것인지 알게 모르게 무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새로운 학년, 새로운 반의 첫날 공기는 3월의 약간 선선한 바람과 함께 어서로 어색해하고 약간은 낯부끄러운 분위기가 지면에 깔려있었는데, 이번연도는 마치 서로 안면을 트고 어색한 분위기가 한층 내려앉은 5월 중후반의 교실 분위기와 거의 흡사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한 무리에 끼어들어볼까 고민도 했지만, 그런 용기도 없을뿐더러 넓은 마음으로 날 포옹해 줄지도 확실치 않아 결국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무색무취 인간처럼 가까스로 교실 안 분위기에 적응해 보는 것에만 애쓰기 바빴다. 작년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신분이 상승되며 학창 시절 마지막 학교의 학생이 된 것에 대한 약간의 자부심과 입시에 대한 걱정거리로 쭈뼛거리며 천천히 융화되었던 작년 반 아이들의 모습이 그리웠다. 각자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첫 만남에 대한 쑥스러움에 두 뺨이 약간 상기되었던 옆자리 윤희. 그런 윤희와 내가 뜨문뜨문 대화를 이어가고 있을 무렵, 앞자리에 앉았던 소영이가 뒤를 돌아 조그마한 커피맛 사탕을 우리 둘에게 나누어주었고 우리를 그날 아침조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서로의 이름을 외웠다.

순하고 음식이든 취향이든 크게 갈리지 않았던 우리는 학기 중뿐만 아니라 방학 중에도 만나 카페에서 빙수를 하나 나눠먹으며 서로의 대한 정보를 차근차근 쌓게 되었다. 마라탕, 떡볶이 등 빨간 국물 음식을 좋아하던 우리. 귓가가 울리도록 시끄러운 힙합보다는 조용하고 마음이 가라앉는 발라드를 좋아하는 우리. 각자 다른 중학교를 나왔지만 한 동네에 살아 버스로 20분 내외에 있는 거리에 서로의 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신기했고, 친구의 친구 건너 건너 이름과 얼굴을 유추하며 서로 알고 있던 사람이 같음이 신기해서 자주 웃었다. 지금쯤 1반 교실에서 수학을 풀고 있을 윤희와 5반 교실에서 사회책을 읽고 있을 소영이가 떠올랐다. 나는 지금도 그때가 그리운데, 너희도 작년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내심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윤희와 소영이가 있을 학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할 일이 없어 교실에서 대충 하나 들고 나왔던 한 손에 들어오는 미니 사회 요약집을 펼쳐보자 하얀 종이에 적힌 글자가 머리 위로 내려쬐는 햇빛에 반사되어 뿌옇게 일그러졌다. 햇빛이 직방으로 내려오는 구령대 앞에서는 도저히 글자를 읽을 수 없을 것 같아 아이들이 모여있는 반대편에 나무들 그림자로 우거져 있던 의자로 옮길까 고민하던 찰나, 귓가에 무언가를 발로 찬듯한 둔탁한 진동음이 울렸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남자아이들이 내던 소리인가 고개를 돌려보니 다름 아닌 축구공이 내 쪽으로 날아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맞겠다는 생각도 할 틈도 없이, 이마에 강력한 충격과 함께 내 고개는 어느샌가 하늘을 바라본 채로 뒤로 나뒹굴고 말았다. 내가 공에 맞았다는 사실은 뒤로 나자빠져 청량하고 맑은 뭉게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쳐다본 지 5초가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고, 잠시 후 거친 숨소리와 함께 한 남자아이가 하늘을 가린 채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가 정확히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에 나질 않았지만, 아마 괜찮은지 물어봤던 것 같았다. 분명 나의 이마를 맞춘 발길질의 주인이었을 것이다. 남자아이가 내민 손에 이끌리듯 잡아 몸을 세우니 신나게 뛰어다니던 반 남자아이들은 일제히 움직임을 멈춘 채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고, 반대편 책을 넘기며 수다를 떨던 여자아이들도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면으로 공에 맞은 이마가 욱신거린다는 느낌도 잊어버린 채 나는 척추부터 머리끝까지 수치심과 창피함으로 온몸이 점점 달아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을 맞은 건 난데, 뭔가 내가 거기 있어서는 안 될 방해꾼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 윤희와 소영이가 옆에 있었다면 괜찮은지 내게 물어봐주고 있었을 덴데. 야속하게도 주변에 나의 이마를 챙겨줄 이는 아무도 없어서일까. 나는 계속해서 사과하는 남자아이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로 구령대 계단을 걸어올라 건물 안으로 뛰어올라갔다. 오늘따라 계단을 오르며 숨이 차는 것이 계단폭이 더 넓어진 건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괜히 뒤통수가 따가웠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순간 내가 왜 이곳으로 뛰어올라왔는지 기억에 나질 않았다. 1층 복도 왼편에 보건실이 보였지만, 공에 맞아 고개가 뒤로 넘어간 것 치고는 이마의 통증도 그리 억세지 않았다. 우선 맞은 부위가 어떤지 살펴보기 위해 오른쪽에 있던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앞 거울 속에 비친 이마를 살펴보니 살짝 빨개진 것 빼고는 피도 멍도 들지 않았었다. 어릴 때 머리로 수박을 쪼갰다던 엄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탓인지 어지러움도 없었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다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세면대 수도꼭지 물을 틀어 손을 씻었다. 차가운 물줄기의 감촉에 달아올랐던 몸의 열기가 조금씩 식히는 것 같았다. 그냥 구령대가 아닌 나무들이 우거진 나무의자에 앉아서 공부나 하고 있을 걸 후회가 들었다. 무리생활이 당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학급 생활에서 혼자인 사람이 생존하기에는 외로움이 징글거리게 따라붙었다. 보통 무리가 형성되는 학급 초기에 누군가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나중에 따라오는 대가는 비참했다. 조별활동을 할 때 어디 팀에 끼어들어야 할지 눈치가 보이는 느낌을 너희들이 알아? 까딱하면 팀활동을 하자는 영어 시간을 내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점심시간에 혼자서 급식실로 내려가는 길이 얼마나 쓸쓸한지를 말이야. 수도꼭지를 잠그고 세면대 밑에 고이는 물 웅덩이가 하수구로 모두 쓸려 내려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 나도 함께 쓸려내려가고픈 생각이 들었다. 물은 좋겠다. 어디로든 흘러갈 수 있어서. 나도 바람처럼,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낙엽처럼, 햇빛 속 부유하는 교실 속 먼지처럼 어디로든 자유롭게 발길이 닿는 대로 떠나고 싶었다.

물기에 젖은 손을 털며 화장실 밖을 나오자 바로 옆에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누가 기다릴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에 갑작스럽게 보이는 누군가의 실루엣은 날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아까 내 이마를 축구공으로 맞춘 그 아이였다. 학급에서 활발하고 인기가 많았던, 언제나 아이들의 중심에 서있던 최동민이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 남자아이를 쳐다만 보자 그 남자아이도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뱉었다.


"머리 괜찮아?"


나도 괜히 민망하여 시선을 그 아이의 명찰이 달려있는 가슴팍으로 떨어트리며 괜찮다고 대답을 했다. 내 대답을 끝으로 짧은 정적이 있었고, 최동민은 눈동자를 굴리다 복도 건너편 보건실을 가리키며 보건실에 가지 않아도 되는지 물었다. 살짝 빨개진 것 빼고는 아프지 않아서 안 가도 될 것 같다고 대답하자, 최동민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으로 공을 찾으면 안 됐는데, 방향 조절을 잘못했어. 미안해."

"아니야. 구령대 말고 나무의자에 앉아있었어야 했어. 미안."


이유 없이 머리를 맞은 건 난데, 오히려 사과를 받아 당황스러워진 최동민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달싹거리는 것을 보았지만,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한동민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내가 들고 나왔던 미니 사회 요약집이었다. 아까 정신없이 건물 안으로 뛰어올라가며 깜빡 두고 나왔던 모양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며 그 아이의 손에 들려진 요약집을 받아 드는 순간, 최동민이 말했다.


"너도 '악몽의 파라다이스' 좋아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악몽의 파라다이스'는 내가 즐겨보던 인터넷 소설이었다. 한참 유행 지난 게임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로, 아마 지금 유행하는 게임을 즐겨하는 아이들에게는 모르는 게임이었다. 심지어 그 게임은 Z세대에 유행했기에, 지금도 그 게임을 즐겨하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시대를 못 따라간다는 인식으로 박혀 실제 그 게임 고인물들만 뒤에서 조용히 애정하며 여전히 플레이를 지속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 게임에서 느낄 수 있는 아날로그적 감성이나 스토리를 좋아해 지금도 즐겨하고 있는 편이나, 주변 친구들에게는 일부러 말하고 다니진 않았다. 그런데 내가 그 게임을 바탕으로 한 그 소설을 읽는다는 사실을 최동민이 어떻게 알고 있다는 것일까? 당혹스러움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를 보던 최동민이 손사례를 치며 급히 말을 이었다.


"미안. 일부러 본 건 아니고, 네 요약집에 안에 붙어있었던 스티커를 봤어. 그거 그 한정판 스티커 맞지?"


순간 저번주에 스티커를 요약집 안에 붙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냥 안 쓰고 두기는 아까워서 괜히 손에 잡히던 책에 붙였는데, 하필 그 책이 미니 사회 요약집이었던 것이다. 게임 골수팬이 만든 소설이라 인터넷상으로만 볼 수 있었는데, 작가가 인터넷에서는 공개가 안 된 추가 외전이 담긴 이야기까지 포함시킨 전체 이야기를 책으로 출판하였다. 내가 책에 붙여놓은 한정 스티커판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그 책은 1차에만 출판되었고 더는 작가가 공개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더는 구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다행히 나는 1차에 샀지만 말이다.


암암리에 골수팬들 사이에서 거래되던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최동민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만 봤으니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을 덧붙였다. 이 한정판 스티커까지 안 다면, 이 아이도 이 게임을 좋아한다는 소리인가? 경계가 가득한 눈으로 주시하던 나를 보던 최동민이 씩 웃었다.


"그 책, 나도 읽고 싶은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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