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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은방울꽃 07화

무사

by 페니킴

끼익! 타이어 긁히는 굉음이 온 도로에 울려 퍼진다. 앞 차와의 간격은 누가 내 앞에 있다면 입김이 닿을 정도의 거리였을까. 어찌나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는지 차가 놀란 듯 덜덜 떨린다.

비가 제법 많이 오던 날이었다. 물놀이에 탄력을 받았는지 매주 수영장 있는 카페에 가자는 아들과 길을 나섰다. 내심 비가 오면 오히려 사람이 적을 것이니 더 여유롭게 온수풀과 따뜻한 자쿠지를 즐길 수 있을까 기대가 되었다. 주섬주섬 수영복과 짐을 챙겨 오후 늦게 길을 나섰다.

이미 여러번 지나 다녀 네비게이션을 보지 않아도 될 정도의 익숙한 길이었다. 이따금씩 거세게 비가 내렸지만 그렇다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여 정속으로 운행 중이었다. 도로는 차가 많이 없어 앞뒤 간격도 널찍했다. 고속도로 일차선을 부드럽게 유영하듯 운전하고 있었다.

특별히 앞에 장애물도 없고 아무 문제도 없었다. 정상적으로 직진만 하고 있던 내 앞에 갑자기 차가 나타났다. 분명 상당히 먼 앞쪽 이차선에서 달리던 차였다. 그 차가 갑자기 왼쪽으로 커브를 돌더니 내 앞으로 역주행 해 오는게 아닌가. 비 때문에 미끄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빠른 속도도 아니고 원래 이럴 작정이었다는 듯 방향을 틀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부딪힐 것 같은 공포에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내 모든 신경세포가 현재 상황에 집중되었다.

제동이 걸린 차는 속도가 줄어든다. 제법 거리가 있었는데도 비로 인한 수막현상 때문인지 앞차가 지척인데 완전히 멈추지 않는다. 다시 한번 엉덩이가 뜰 정도로 다리를 쭉 뻗어 브레이크를 끝까지 밟는다. 기우뚱 덜컹! 가까스로 멈춘다. 나 대신 차가 갑작스런 속도 변화에 적응 못하고 부들부들 떤다.

절로 욕이 치솟는다. 하지만 그럴 시간도 없다. 여기는 고속도로이다. 순간 뒤를 바라보니 다행히 바로 뒤에 차는 없다.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내 차는 섰지만 뒤차가 보지 못하고 충돌을 일으키면 큰일이다. 내 옆에는 아들이 타고 있지 않은가.

앞차가 미끄러진 것인지 운전 미숙인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앞차가 차를 조금 뒤로 뺀다. 원래 가던 이차선으로 가려나 싶어 나도 살짝 뒤로 차를 뺐다가 옆으로 비껴 벗어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차가 무슨 생각인지 다시 내 차를 향해 오는 것이 아닌가. 미친 듯이 경적을 울린다.

앞차가 주춤 하던 사이 급하게 옆으로 차를 빼 그 차를 뒤로 남겨두고 앞으로 운전해간다. 모든 것이 놀랄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뇌보다 몸이 빨랐다. 모든 일이 지나가고 안심이 되니 떨릴 법도 한데 워낙 담담한 성격이라 떨림보다는 화가 난다. 내 대처가 잘못되었다면 사고가 났을 것이 자명했다. 사이드미러로 그 차를 확인한다. 다시 방향을 틀어 정상적인 운행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고의 원인이 될 뻔 했던 일은 없었다는 듯 다른 차 속으로 사라진다. ‘어떻게 저렇게 운전을 하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고에 대처하느라 시각을 제외하고 닫혔던 모든 오감이 그제서야 다시 활동한다.

나는 입으로 화를 뱉어내며 아무렇지 않게 운전 중이다. 중간에 설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때서야 옆좌석 아들을 바라본다. 아무렇지 않다. “울애기, 안놀랐어?” 물으니 “아니.”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의연히 앉아 있는 아들을 보고 내가 짐짓 놀란다. “왜 안놀랐어?” 물으니 “엄마가 아무렇지 않으니까.” 하고 대답한다.

상황이 종료되고 다시 평안한 상태로 돌아오니 그저 무사함에 안도가 된다. 아무 일도 없다는 것, 우리 둘 다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조금 더 차를 달려 수영장 카페에 도착한다. 계획한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다. 지나갔고 무사하다. 그렇다면 현재를 즐겨야지. 아들에게도 모든 것을 잊고 편안히 놀아라고 하고 나도 고소한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녹인다.

며칠이 지난 후 사고가 날뻔한 상황을 친한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는 신고를 했어야지 아무것도 안했냐고 물었다. 블랙박스도 다시 보기 싫어 안봤다고 했더니 언니가 어이없어 한다. “사고가 안났으니까,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하니 언니가 “너도 참.”하고 말한다.

티비를 틀면 갑작스런 사고나 질병으로 하루 아침에 인생이 달라진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원래 누렸던 일상이 그립다고 한다. 당연한 줄 알았는데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고 말한다.

때때로 특별한 일 하나 없는 일상이 답답할 때가 있다. 자극적인 사건을 기대하며 하루를 버티기도 한다. 오늘과는 다른 내일의 나를 늘 꿈꾼다. 그렇지만 그저 오늘 하루 무사하다는 것, 편안히 눈감고 내일 아침 눈뜰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오늘이 감사하다. 오늘 아무 일도 없어야 또 내일이 다가올테니 말이다.

새로 빨래를 해서 잘 개켜놓은 옷에서 나는 산뜻한 냄새를 ‘새물내’라고 한다. 새물내나는 옷을 입고 집을 나서는 ‘무사’한 오늘을 마음껏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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