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순 밥 지어다가
기름진 산해진미, 없는 살림에 조금조금.
맛난 떡 지어다가
달콤한 유과 탕과, 없는 살림에 또 조금조금.
한 해 내내 오늘을 기다려
떠난 임 오실 자리 앞서 윤을 낸다.
꽃 자수 방석 놓으면 그대 한 번 웃을까.
그릇마다 옻칠하면 그대 하루 더 머무를까.
그리워 울기보단 재회의 기쁨이 별 아래 가득하고,
곱게 휜 저 달은
우리 입매를 닮았구나.
후일
바르고 고운 얼로 따르고자
세속의 비명, 탐욕의 허기, 거짓된 모든 것을 경계하는데
임은 아실까, 나 홀로 댕기머리.
떠난 날,
꼭 다시 오실 임을 기다리며
나 홀로 푸른 댕기.
아버지 첫 제사를 준비하며 적었던 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서 우리 집은 가세가 형편없이 기울어 옥탑 단칸방에서 세 식구가 함께 살았다. 키우던 강아지를 차마 버리지 못해서, 친척 오빠에게 "여기가 사람 사는 집인지 개 집인지 모르겠다"는, 개를 버리라는 말을 대놓고 들었지만 그래도 그 좁은 집에서 강아지까지 식구로 여기며 함께 살았다. 남동생은 한 사람이라도 입을 줄여보겠다고 입대를 했고, 나는 제사용 목기도 없어 플라스틱 그릇에다가 아버지 첫 제사 음식을 올렸다.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 제사를 포기하자고 하셨지만, 나는 이십대 초반 다니던 대학도 그만두고 보험회사를 다니며, 결국 혼자 상을 차렸다. 시골 큰 아버지댁에 내려가 제사상 차리는 법을 노트에 적는 등 따로 배워오기도 했다. 첫 제사가 얼마나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힘들었는지 화장실에서 피를 보았고, 이후 병원에도 가야했다. 옥탑 단칸방에서 치뤄지는 제사라, 친척 어르신들은 현관에 서서 신발 위에서 절을 하셔야 했는데, 나는 냉장고 옆에 바짝 붙어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훔쳤었다.
이 시는 그 때 울면서 적었던 시다.
15년이 지난 지금은 아버지 제사가 집안의 전통이 되었다. 올케의 바람으로 간소화 하긴 했지만, 조카들도 좋아하는 집안의 큰 행사로, 어머니도, 남동생도 한 해 달력을 사면 아버지 제삿날부터 찾는다. 나는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만에 하나 정말 혼령이 있다면 그래서 아버지께서 배를 곪으신다면 속에서 천불이 날 것만 같다. 그래서, 내가 죽는 그 날까지 계속 아버지 제사상을 꾸준히 차려드리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아버지는 가난 탓에, 어려서부터 친구 집에서 공부를 가르쳐주며 더부살이를 하셨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도시락을 싸 줄때는 밥을 살살 얇게 펴 담아서, 아버지께서 밥을 드시기 전 도시락을 몇번 흔들면 밥 뭉치가 도시락 귀퉁이에 조금 들어차 있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하셨다. 평생 먹는 것으로 눈치를 보시는 면이 있으셨고, 가족끼리 식사를 할 때도 우리가 밥을 다 먹고 나서야 본인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셨다. 행여 음식이 부족할까봐 그러셨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께서 혼령이 되어 밥을 굶으신다면….
세상 사람들 전부가 제사란 풍습을 미개하다 말하더라도, 그렇게 싹둑 단발을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홀로 댕기머리를 할 생각이다. 사랑하는 아버지, 내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