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기, 그 일곱 번째 이야기
글쓰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심지어 나보다 훨씬 글을 더 잘 쓰는 사람들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글쓰기가 전혀 어렵지 않다. 아니 솔직히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가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하는 생각을 해 보곤 한다.
나 역시 매번 글을 쓸 때마다 어떤 글감으로 글을 쓸까 싶어 두리번거리게 된다. 얼핏 보기엔 꽤 쉽게 글을 쓰는 듯 보여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마르지 않는 샘물도 아닌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용한 재주가 있어서 글을 쓸 때마다 소재를 척척 뽑아낼 수 있겠는가? 어쩌면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고민과 탐색의 과정을 거쳐야 나 역시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 통과의례를 거칠 때마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어떤 날은 비교적 쉽게 찾아낸다. 다행스럽게도 그럴 때는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거침이 없다. 그러나 늘 글을 쓸 때마다 글감이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데다 매번 새로운 글감이 나타날 리도 없다. 그건 가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 이치를 쉽게 알 수 있다. 아무리 노래를 잘하기로 소문난 가수라고 해도 항상 신곡이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특정한 시기에 새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는 늘 불러왔던 노래 중에서 그때그때의 상황이나 감정에 어울리는 곡을 선택하여 부르곤 한다. 심지어 상황에 따라서는 자신의 곡이 아닌 노래를 불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아마도 이런 사정은 작가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글쓰기를 본업으로 하는 그들도 그러하다면 나 같은 아마추어 작가지망생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 말은 곧 글을 쓸 때마다 어떤 글감으로 글을 써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도무지 어떤 글감으로 글을 써야 할지 몰라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 역시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셈이다.
대체로 나는 글감 찾기에 돌입하면 무조건 5분 이내로 승부를 보려 한다. 경험상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오래 붙들고 있다고 해서 정작 글쓰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익히 알기 때문이다. 길어 봤자 10분 남짓한 시간이 소요될 뿐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정해진 시간 내에 글감을 찾아내고 만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내 나름 터득한 방법이니 실패한 기억은 거의 없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이 역시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훈련해야 한다는 건 글감을 찾는 최대의 시간을 정해 놓고, 어떻게 해서든 정해진 시간 안에 찾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분명 처음에는 쉽지 않아도 훈련만 하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한두 달만 습관을 들여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굳이 내가 글감을 찾을 때에 짧은 시간을 들이려는 이유는 불필요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핵심적인 건 무엇이든 한 편의 글의 꼴을 갖추겠다 여겨지면 달려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 장롱 문을 열고 내가 덮으려는 이불을 찾아야 할 때가 있다. 하필이면 내게 필요한 이불이 가장 아랫단에 놓여 있는 게 보인다. 그럴 때 맨 위부터 차근차근히 다른 이불들을 내린 뒤에 꺼내도 되지만, 무리한 힘을 줘서라도 이불을 들어 내버리기도 한다. 다소 꼴 사나워도 지금 당장 곯아떨어질 정도라면 일단 한숨 자고 난 뒤에 이불을 정리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글을 쓰는 것과 글감을 찾는 것, 이 두 가지 중에서 과연 어떤 게 더 큰 목적인지를 생각해 보면 명확히 정리될 듯하다. 글감을 찾는다고 해서 필요 이상의 시간을 소모하거나, 막상 글은 쓰고 싶은데 또는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마땅한 글감이 없어 글쓰기에 실패한다면 이건 주객이 전도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 어떤 글감이든 여봐란듯이 온전한 형태의 모습, 즉 글의 서두에서 꼬리까지 완벽한 형태의 것을 보장할 만한 소재가 나타날 리 없다. 글감 찾기가 의외로 쉽다면 세상에 글을 쓰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주 작은 틈이라도 보이는 글감이 있다면 일단 달려들어 시작하고 볼 일이다. 물론 시작은 문장 하나에서 비롯된다. 그 문장에 다른 하나의 문장을, 거기에 또 다른 하나의 문장을 더해 가는 일이 글쓰기의 과정이고, 바로 소설 쓰기의 비결이 아니겠나 싶다.
나는 소설을 쓸 때 앞뒤를 재지 않고 막 쓴다. 생각보다 너무 성의 없이 말을 한 것 같아도 사실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어디까지나 소설가 지망생인 나는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고정적인 독자층이 있어서 그들과 모종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마감일에 쫓기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쩌면 내가 이럴 수 있는 건 아직 등단하지 못한 자의 특권인지도 모르겠다.
또 내가 쓰려는 소설이 이미 다른 기성 작가가 한두 번 우려먹은 것이든 말든 그 역시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다. 감히 말하자면 아무리 위대한 작가가 나보다 먼저 선수를 쳤다고 해도, 그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문체는 분명 있을 터였다.
말이 난 김에 내가 쓴 단편소설인 「익사」를 예로 들어, 내가 소설을 쓰는 간단한 절차를 그려보겠다.
첫째, 소설을 이끌어 나갈 전체적인 상황이나 배경 등에 대해 그려 본다. 가령 20년 이상 결혼생활을 한 부부의 이야기, 혹은 친족으로부터 오랜 기간 동안 성폭력을 당한 한 여자의 이야기, 무심한 남편에 질린 어느 한 여인이 다른 남자의 관심에 눈을 뜨는 이야기 등이 문득 떠오른다. 만약 여기까지 왔다면 곧장 소설 쓰기에 돌입할 수 있다는 신호나 다름없다. 돌다리도 두드려야 건너는 법이지만, 때로는 지나친 신중함이 독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 봤자 망설임의 시간만 늘어날 뿐이니 그럴 바엔 차라리 서두르는 게 낫다.
「익사」는 앞서 열거한 것 중에서, '무심한 남편에 질린 어느 한 여인이 다른 남자의 관심에 눈을 뜨는 이야기'라는 상황을 토대로 쓰게 된 것이다. 제목을 익사라고 적은 이유는, 어린 시절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기억처럼 그녀가 무방비하게 한 남자에게 빠져드는 과정을 강조하기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가, 소재 혹은 주제가 너무 진부하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진부하다는 이유만으로 폐기 처분해야 한다면 아마도 세상의 그 어떤 소설도 쓸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문체로 일단 쓰고 보는 것이다.
둘째, 대략적인 상황이나 배경 등이 확정되면 일전에 말했던 최초의 문장부터 떠올린다. 여기에서 소설의 '첫 문장'이라고 하지 않고, '최초의 문장'이라고 표현했다는 점에 대해 주목했으면 한다. 이미 그것은 앞선 글에서 말했듯 최초의 문장이라는 표현은 소설을 쓸 때 가장 처음으로 쓴 문장이라는 뜻이다. 최초의 문장을 써야 그다음의 문장으로, 또 그 다음다음의 문장으로 연결할 수 있게 된다. 그 가교의 역할을 하는 게 바로 당신이 알고 있는 '첫 문장'에 해당한다.
그 '첫 문장'의 개념과 중요성을 전면에 내세운다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기능이 크게 부각되기 때문에, 첫 문장의 중요성이 지나치게 강조될 우려가 있다. 즉 첫 문장이란 독자가 작품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부분이라서 이렇게 혹은 저렇게 써야 한다,라는 식의 잘못된(?) 인식이 각인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난 개인적으로 '첫 문장'이라는 말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겐 첫 문장 따위는 없다. 단지 최초의 문장만 있을 뿐이다.
난 수영을 못한다.
기껏 최초의 문장 하나를 적자마자 난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한다. 소설의 첫 시작을 '나'로 적고 만 것이다. 소설의 여주인공의 이름이 영미이든 영숙이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미 '나는'이라고 시작한 이상 소설 속에서 이 '나'의 이름은 큰 의미가 없다. 혹시 그녀의 이름이 뭐냐고 묻고 싶은가? 솔직히 그건 나도 모른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녀의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을 수도 있고, 설령 그녀의 남편이나 불륜 상대인 남자가 '영숙아' 혹은 '영숙 씨'라고 부른다 해도 그녀의 이름이 사건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진 않을 것이다.
셋째, 최초의 문장에 다른 문장들을 하나하나씩 더해간다. 이건 마치 레고 블록을 조립하는 것과 이치가 같다. 가령 어떤 건축물을 조립한다고 가정하면, 맨 아래에 가장 넓은 가로판이나 혹은 대형 원형판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런 뒤에 그 위에 레고 조각들을 하나하나 끼워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완성된 내 레고의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난 수영을 못한다. 아주 어릴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이후로 물이라고 하면 근처에도 가지 않게 되었다. 그때의 기억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특히 물에서 허우적댈 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속으로 밀고 들어오던 물의 그 섬뜩한 촉감을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뻣뻣해진다. 그 어떤 고통에 빗댈 수 있을까? 물은 내게 최악의 기분을 갖게 하면서 그렇게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맨 첫 단계인 '상황이나 배경 그리기' 과정에서 전혀 진전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지금 당신이 있는 곳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무엇이든 쓰기'다. 사실 글은 언제든, 그리고 어디에서든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물론 가장 쾌적하고 편안한 공간이 분명 어딘가에는 있겠지만, 늘 그런 곳에서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잘 활용하기만 하면 출퇴근하는 동안 대중교통수단 안에서도 근사한 글쓰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가령 나 같은 경우에, 생각보다도 지하철, 열차, 그리고 버스 등에서 글을 쓰는 게 어렵지 않았다. 옆에 늘 사람이 앉아 있고 주변에 선 사람들도 적지는 않으나, 그 어느 누구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는 건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표면적으로는 과밀한 환경으로 보여도 철저히 독립된 공간 못지않을 정도로 개별적인 자유는 보장된다.
가끔 글을 쓰는 환경을 바꿔보고 싶다면 과감하게 지하철, 열차, 버스 안 등에서 글을 써 보라며 추천하고 싶다. 성격이나 집중하는 정도에 따라 그 효과는 천차만별이지 않겠나 싶다. 무엇보다도 글도 쓰고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바로 그곳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글을 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게 바로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글, 특히 소설이란 건 얼마나 많은 관찰이 뒷받침되었느냐에 따라 순탄하게 풀어갈 수 있는 장르의 글이기 때문일 테다.
소설 쓰기 팁 4. 눈에 보이는 대로 쓰기
아무런 글감이나 대략적인 사건의 개요도 없이 소설을 쓰고 싶을 때가 나는 가끔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주변에서 보이는 것을 위주로 해서 아주 짧은 소설을 써 보곤 한다. 가령 지하철 안에서 내가 본 모습을 예로 들어 짧은 소설을 하나 써 볼까 한다.
(1) 1단계: 눈에 보이는 대로 짧은 글 쓰기
☞ 내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대략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람이다. 키도 굉장히 크고 생김새도 보통 이상인 걸로 봐선 아마도 대학생이라면 같은 과에서 제법 인기도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전반적으로 살이 찐 스타일은 아닌 데다 전완근이 쫙쫙 갈라지는 걸 보면 평소에 운동 꽤나 하는 사람인 듯하다. 주머니가 달린 카고팬츠를 입은 그는 어쩌면 자기 몸보다 더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 두고 휴대전화를 보고 있다. 폰을 쥔 왼손 손가락에 묵주 금반지가 보인다. 물어보나 마나 성당을 다니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내 맞은편 오른쪽에 있던 여자도 카고 팬츠를 입고 있다. 숄더백을 맨 그녀 역시 표정의 변화 없이 휴대전화만 보고 있다. 나이는 역시 20대 초반인 듯 보인다. 똑같이 카고 팬츠를 입고 남자와 같은 역에서 타긴 했어도 일단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닌 것 같다. 두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그렇게 매칭하기엔 남자 쪽이 많이 기우는 느낌이 든다. 뭐랄까, 여자는 그냥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2) 2단계: 눈에 보이는 내용을 짧은 소설로 바꿔 쓰기
☞ 지하철 출입문이 닫히기 직전에 올라타자마자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그 녀석의 맞은편이었다. 형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뭐라고 경고를 주기 전에 우선 어떤 녀석인지 면밀한 관찰이 필요했다.
20대 초반이라는 것 말고는 녀석의 정확한 나이를 형수도 알지 못한다. 다만 생김새도 보통 이상인 데다 키가 굉장히 크다는 말만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다. 줄곧 뒤를 따라오면서 봤지만, 아마도 녀석은 형수보다 머리 절반 정도는 큰 듯했다. 입만 열면 자신은 키가 큰 남자가 좋다고 했던 주희의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적당한 살집에 전체적으로 어깨가 넓고 심지어 남자인 주제에 가슴팍까지 넓어 보였다. 더군다나 소매를 걷어 드러난 팔뚝엔 전완근이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보나 마나 운동 꽤나 하는 녀석이 틀림없었다. 의외로 녀석의 옷차림은 촌스러웠다. 주머니가 달린 카고 팬츠를 입은 그는 자기 몸보다 더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둔 채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게다가 장식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왼손 손가락에는 묵주 금반지까지 끼고 있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모르게 옷차림이 너무 요란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녀석의 왼쪽에 앉아 있는 여자도 카고 팬츠를 입고 있었다. 숄더백을 맨 그녀 역시 표정의 변화 없이 휴대전화만 보고 있다. 나이는 역시 20대 초반인 듯 보인다. 똑같이 카고 팬츠를 입고 있던 그녀는 녀석보다는 이전 역에서 탑승한 것 같았다. 일단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멀쩡히 남자친구인 형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희에게 접근한 녀석의 저의가 불손하기 때문이었다.
막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에 여자가 오른손을 움직여 녀석의 허벅지에 올렸다. 그제야 녀석은 여자의 어깨를 왼손으로 끌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잘 봐줘도 남자 쪽이 많이 기우는 커플이었다. 저렇게 평범해 빠진 여자를 녀석이 왜 좋아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가만,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애인을 놔두고 녀석이 주희에게 치근덕댔다는 뜻이었다. 이 사실을 과연 주희가 알고 있을지 의문이었다. 당장이라도 주희에게 전화를 걸려던 형수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아무래도 이걸 알면서도 녀석의 도발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평소 주희의 밑도 끝도 없는 성격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터였다. 형수는 며칠 더 녀석을 관찰해 보기로 마음먹고 지하철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