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10년이 훌쩍 넘은 장롱면허가 있었다. 다행히 이 면허가 독일에서도 유효해서, 독일에 오자마자 한국 면허증을 독일 것으로 바꾸고는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베를린은 워낙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어 운전을 해야 할 일이 거의 없었으나, 지금 살고 있는 루드빅스하펜은 차가 없으면 장 보러 가는 것도 쉽지가 않아 요즘은 매일 운전을 하고 있다. 내가 독일에서 처음 몰았던 차는, 남편의 14년 지기 소형 도요타였는데, 시어머니께서 타시던 차를 물려받은 남편은 라디오가 멈추고 에어컨이 고장 날 때까지 이 차를 몰고 있었다. 덕분에 눈치 보지 않고 운전연습을 할 수 있었지만, 한 여름에 운전대를 잡고 손이 덴 날은 헛웃음 밖에 나오지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언 1년을 애물단지 고물차와 함께 지냈다. 내비게이션이 없어 5분 거리 슈퍼를 가는 길에 길을 잃기도 하고, 처음 아우토반을 지나 출근을 한 날에는 텅 빈 주차장 구석에 쿵하고 차를 박기도 했다. 비 오는 날 골목길 운전을 하다 값비싼 벤츠를 박아 경찰을 부른 날도 있었다. 14년 동안 한 번도 사고를 내지 않았던 남편은, 나의 파란만장한 운전 솜씨에 혀를 내두르기 일쑤였다.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하이델베르크로 출퇴근하던 때는, 아우토반에서 속도를 어겨 처음 교통딱지를 받기도 했다. 50킬로 속도 내는 것도 겁나 쩔쩔매던 나를 기억하는 남편은, 그저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볼 뿐이었다.
독일은 법적으로 2년에 한 번씩 차량 점검을 받아야 하는데, 백만 원이 넘는 점검비를 내는 것이 아까운 시기가 되자, 우리는 새로운 차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에어컨은 있고 수동기어 따위는 없는, 문 네 짝짜리 차를 몰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이미 신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심 드디어 독일차를 타보겠다는 생각에 더욱 셀레 었던 것 같다. '벤츠는 너무 비싸니까, 폭스바겐이 낫겠지?' 남편에게 말은 안 했지만 나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독일차 브랜드의 로고가 떠 다니고 있었다.
"우리 기아차 사자!"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이 현관문을 들어서며 말했다. 독일에서 굳이 한국차를 사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머뭇머뭇 대답을 망설였다. 아우토반에서 기아나 현대차를 만날 때면 한국인으로서 자긍심도 느끼고 조용히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내가 여기서 내 고국의 차를 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남편의 논리는 간단했다.
"튼튼하고 저렴하잖아, 워런티도 7년이나 된다고."
독일차의 보증기간은 1년 남짓인 반면, 기아차는 유럽에서 7년 워런티로 크게 광고를 하고 있었다. 여기는 아직도 수동차를 주로 몰기 때문에, 오토매틱으로 교환 시 추가금을 내야 하고 라디오나 내비게이션 등도 옵션으로 따로 구매를 해야 한단다. 하지만 기아차는 그런 부수비용을 줄일 수 있고, 같은 값이라면 독일차보다 훨씬 좋은 사양을 고를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냐는 것이었다.
"나는 독일에 있으니까... 독일차를 탈 줄 알았어서... 하하"
나의 감성적인 논리는 이성적인 남편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렇게 기아차를 샀다. 그것도 새 차가 아닌 중고차. 이유는 내가 운전을 잘 못하니, 굳이 깨끗한 새 차를 탈 필요가 없다는 것. 나는 깨끗이 항복했다.
막상 내 첫 독일 생활을 함께 해준 고물차와 헤어지려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남편도 그랬는지, 떠나보낼 차와 작별의 의미로 사진을 남겨달라고 했다. 독일에서는 중고차를 살 때, 현재 고객이 가진 차를 사주는 것이 관례인데, 중고차 딜러 아저씨도 이렇게 오래된 차는 오랜만에 보시는지 멋쩍은 웃음을 지으시고는 30만 원의 몸값을 돌려주셨다. 그리고는 우리를 새 차에게로 안내해 주셨다. 누군가가 1년 조금 넘게 탔다는 기아 스포티지. 중고차라는 딱지가 무색할 정도로 깨끗하고 새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중고 차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드디어 에어컨과 내비게이션이 작동하는 슈퍼카
우리의 이름과 결혼기념일이 담긴 번호판을 달고 보니, 어느새 이 차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널찍한 좌석에 편히 누워 시원한 에어컨을 켜고 아우토반을 달리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 차를 왜 그렇게 탐탁지 않게 여겼을까.' 새삼 새 차에게 미안함이 느껴졌다.
독일은 명실상부한 자동차의 나라다. 전 세계를 호령하는 굴지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차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싸거나 유명한 브랜드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특히 젊은 친구들은 부모님의 오래된 차를 물려받아 타거나, 작은 중고차를 타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우토반을 씽씽 달리는 잘 빠진 스포츠카의 운전석과 조수석에앉아 계신 노부부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젊을 때 절약하고 노년에 즐기는 독일 사람들의 삶을 잘 보여주는 예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그럼에도 나는 젊고 에너지 넘칠 때 즐기며 살고 싶다'며 저항을 해보기도 했지만, 이제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남편이 고수하는 '돈 안 써도 행복할 수 있다'는 논리에 서서히 젖어들고 있는 것 같다.
오래된 고물차와 이별하는 날, 이미 젊음이 무기인 것을, 자동차 하나 따위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이 독일 청년의 배포가 멋져 보이기도 하고, 너무나 쉽게 겉모습만으로 평가받으며 사는 삶에 익숙해진 나와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독일에 있어 많은 것을 누릴 것이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내가 독일에서 배우는 것은 '가지지 않는 자유'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누구보다 낫기 위해 돈과 시간을 쓰지 않는 사람들. 자기가 필요한 만큼의 양과 질이면 충분히 행복할 줄 아는 독일 사람들의 모습이 나는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