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열정

멈출 수 없는 그것, 사랑

by Bora

케냐 한글학교 개학식이 있었다.

또다시 가슴이 뛰었다.

나는 케냐 한글학교 교사로 11년째 봉사하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을 교실에서 만날 때마다 늘 다짐하는 것은 ‘사랑하고 사랑해야지’라는 마음이다. 아이들과의 만남은 고작 1주일에 하루 그것도 3시간 30분뿐이지만 이 시간만큼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내 작은 소망이다.


1992년 나는 늦깎이 신학생이 되었다. 신학생이 되자마자 열정 하나로 교회 사역을 시작했다. 같은 학교 한 분의 소개로 ‘서울시 성동구 화양동’ 빌라 건물 지하에 있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부서를 맡게 되었다. 그 어떤 재주가 많아서 일찍부터 사역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있었을 뿐이다.

어느 해, 여름 성경학교가 3박 4일 동안 있었다. 교사로 봉사했던 삼십 대 중반의 여자분이 있었는데 평소에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녀의 첫째 아이는 재능이 많을 뿐 아니라 예뻤다. 둘째 아이는 언니와 다섯 살쯤 나이 터울이 있었다. 그녀는 둘째 아이가 아들이기를 많이 기대했었는지 큰 딸과 다르게 둘째에게는 예쁜 옷을 입히기는커녕 머리카락에 빗질을 해 주지 않아 아이는 늘 꼬질꼬질했다. 사랑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이는 언니가 어딜 가나 따라다녔고 엄마를 보면 칭얼거리기 일쑤였다. 엄마는 딸의 맘을 알면서도 모르 척하는 것 같아 마음 한쪽이 아렸다. 성경학교 내내 나는 2살 백이 아이를 등에 업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아이는 내 등에 업혀 언니들과 함께 율동도 하고 영화도 보고 식당에도 가고 슈퍼에도 갔다. 내 등에 대롱대롱 업혀있는 아기에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아이를 보듬어 주었다. 나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전혀 힘들지 않았고 아이가 내 등에서 즐겁게 웃고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하고 행복했다.

1999년 사역하는 선교회에서 유럽으로 선교여행을 가게 되었다. 프랑스 목사님과 결혼을 한 한국 여자 선교사님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250명의 젊은이들은 프랑스에서 1주일 동안 수련회를 갖은 뒤 스위스, 체코, 독일로 유럽을 순례했다. 2주 동안 리무진 2층 버스 5대가 대륙을 횡단하는 동안 그녀의 어린 둘째 딸은 거의 방치가 되었다. 30십대 초반의 엄마는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통역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내 눈에 둘째 아이가 밟혔다. 나는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해서 자주 칭얼대는 아이를 버스 안에서 업고 문 앞을 자주 서성거렸다. 그때마다 울음을 멈추고 내 등에 잠이 들었던 아이. 행복하고 행복했다.


내가 케냐 한글학교 교사를 시작한 것은 11년 전 빈야드 학교에서부터였다. 그때 가장 어린 반 도우미 선생으로 봉사를 하게 되었는데 케냐 현지 학교는 교실과 화장실이 허름했다. 사립학교였는데도 깨진 변기는 교체하지 않았고 토요일이면 화장실과 밖에 있던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안 나오는 날이 더 많았다. 그나마 모래가 있던 놀이터가 가장 인상 깊었다. 아이들 휴식 시간은 40분. 나는 그 시간이면 놀이터에서 아이들 양말과 신발을 벗기고 안전하게 놀 수 있도록 도왔다.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것은 형제가 주스를 마셨던 컵에 모래를 가득 넣고 그 위에 작은 돌멩이로 데코레이션을 한 ‘컵케이크’가 인상 깊다. 내가 아이들에게 건네받은 케이크를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하자 아이들은 신이 나서 속도를 내어 컵케이크를 만들어 냈다. 그날 내가 먹었던 모래 컵케이크는 20개쯤이나 될 것이다. 행복하고 행복했다.

한글학교가 카렌 WNS 학교로 이사를 간 후로는 4,5,6살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토요일 아침이면 교실 안으로 아이들이 들어올 때마다 작은 몸을 꼭 안아 주었다. 한국 환경부에서 케냐 한글학교 학생들에게 강의가 있던 날, 사랑스러운 여자 아이 둘이 내 양쪽 무릎에 한 명씩 앉아 강의를 들었다. 누군가 무겁지 않냐고 물었지만 사랑스러움과는 바뀔 수 없는 자리였다. 차 안에서 3살 아이가 학교를 갈 때마다 내 무릎에 앉아 더듬더듬 거리며 말하던 모습 , 아기가 돌아오는 차에서는 영락없이 내 품에 안겨 침을 흘리며 잠자던 모습. 이 또한 행복하고 행복했다.


내가 속한 선교회 주요 사역은 대학생과 젊은이들 대상으로 하는 선교이다. 한국에서부터 34년 동안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얼마나 귀한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계속 일어나는 소원이 있다. 그것은 시골 지역의 '고아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꿈이란 무엇일까?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을 성취하는 것이 종점이 아니라 찾고 이루어 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한 발자국씩 걸음을 걸으려 한다. 첫 번째 시도는 시골을 여행하며 현지인이 운영하는 고아원을 방문하고 싶다. 단체나 선교사라는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옆에서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웃이 되고 싶을 뿐이다.

나에게는 아직 십 대인 세 아이들이 있다. 이 아이들 또한 내가 돌보아야 할 사랑하는 아이들이다. 그래서 아이들 방학 중에 혼자 배낭을 짊어지고 '1주일 시골 머물기'를 하고 싶다. 두 번째는 스왈 리어 공부를 꾸준히 하는 것이다. 언어를 익히는 것이 아주 느린 사람이기에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한 걸음씩 걷다 보면 가야 할 길이 보일 것이며 그 가운데 분명 기쁨이라는 선물이 주어질 것이다.

남편에게 말했다. “아이들 방학 때 혼자 시골여행을 하고 싶은데......” 남편이 어떤 대답을 했겠는가? 당연히 “물론이지!”라고 답했다.

내 안에 열정이 넘친다는 걸 진작 알아본 남편이다. 남편은 부모형제보다 더 오래 동안 함께 살아가는 20년 지기 친구이다. 우린 일심동체이면서 이심이체이다.

작은 소망을 꿈꿔 본다.

세월이 흘러 흘러 내가 꼬부랑 할머니가 되고 먼 훗날 죽음의 문 앞에서도 사랑하는 것을 멈추고 싶지 않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런 고백을 하고 싶다. 사는 날 동안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했노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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