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서의 나

마음의 소리

by Bora

사람 제각기 다른 기질과 재능을 갖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성경에도 각 사람에게 카리스마 즉 은사(선물) 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돌아보니 특별하게 잘하는 것이 없다.
노래를 좋아하나 노래를 잘하는 것은 아니요 춤을 좋아하나 춤을 잘 추는 것도 아니요 그림을 좋아하나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아니요 책을 좋아하나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그뿐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악기 중에 무엇 하나 제대로 다룰 줄 아는 것은 없지만 모든 악기 연주를 좋아한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는 데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긍휼’이라는 마음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아이였다. 학교에서 남자아이들이 친구들에게 욕을 하거나 놀리기라도 하면 작은 여자아이들은 내 옆으로 몰려왔고 나는 그 아이들을 보호했다. 6학년 1학기 때였던가? 나보다 키 크고 단발머리에 눈이 반짝이는 여자아이가 전학을 왔다. 친구 집은 학교 샛길로 나가면 바로였는데 부모와 함께 살지 않고 고모 댁에 얹혀살게 된 아이였다. 아침과 저녁으로 고모 집 살림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공부 잘하고 부모 입김 좋았던 기 센 여자 아이들은 전학생을 왕따 시키며 상처가 되는 못된 말을 하며 바보라놀렸다. 여린 마음의 친구는 책상에 엎드려 자주 울었다. 어느 날 우연히 나는 친구 고모네 집 부엌을 들어가게 되었다. 커다란 부엌이 잘 정리되어 있었고 부뚜막에 솥들은 반짝반짝 빛이 날 지경이었다. 분명 친구의 손이 많이 간 부엌이었다. 열세 살 친구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져 왔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단발머리 친구는 바보가 아니었다.


나는 3남 1녀의 막내딸이다. 막내라는 이유로 귀여움과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큰오빠는 나와 9살 차이 난다. 오빠는 한쪽 다리가 불편했지만 친구들은 함부로 오빠를 대하지 안 했다. 친구들과 친동생에게 인정을 받았고 나는 동생들에게 엄격한 오빠가 무섭기까지 했다. 무더운 여름에도 반바지를 입지 않았던 오빠가 새로 이사 온 집에서 헐렁한 운동복을 입고 바지를 걷어 올린 적이 있었다. 처음 내놓은 오빠의 두 다리를 보았다. 왼쪽 종아리는 근육은 튀어나올 정도로 튼튼했지만 오른쪽 다리는 너무나 가늘었다. 내 눈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오빠가 볼 새라 먹다 만 복숭아에 얼른 눈을 돌렸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12년 동안 학교를 다니며 등교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던 오빠. 길에서 친구라도 만나게 되면 친구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 걷는 속도를 더 빨리 내었을 오빠의 다리. 버스를 노칠 세라 걸음을 흩트리며 마구 뛰었을 오빠의 오른쪽 다리. 오빠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더 이상 오빠가 무섭지 않았다.


서울 생활이 고뇌스럽던 어느 해 성경을 깊이 읽게 되었다. 성경의 큰 주제는 사랑이다. 성경은 나에게 자꾸 말을 걸어왔다. 아버지를 용서하라는 메시지였다.

농사일이 거의 없는 긴 겨울, 동네에서 자주 노름판이 벌어졌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엄마에게 돈을 달라며 떼를 썼다. 때론 나의 세상이었던 엄마를 때리기까지 했. 그러나 아버지는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은 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과수원과 논과 밭일에 몸을 아끼지 않으셨다.

받은 사랑보다 아픔이 더 컸던 것일까? 술만 취하시면 돌변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싫고 미웠다. 그런 이유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서울로 상경을 하리라 결심을 했는지 모른다.

자취방 안에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던 어느 겨울날, 밤새 무릎을 꿇고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기도하자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 이후 아버지가 살아온 한 많은 사연이 내 가슴 고스란히 다가왔다. 아버지의 술주정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20대와 30대 그리고 40대와 50십대 초반에도 이웃을 사랑하며 봉사하는 삶이 최고의 업이라 믿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한국을 떠나 케냐에 온 지 18째를 맞이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어느 모임에서든지 ‘외톨이’(소외된 자, 외로운 자)에게 마음이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톨이는 가시가 많다. 때로는 그 가시가 돕는 이의 맘을 상하게 한다. 그러나 올해도 하늘의 선물인 '긍휼'이라는 은사로 외톨이들을 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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