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확인하다

조카의 전화

by Bora

아침 준비를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름 없는 번호가 스마트폰 화면에 떴다.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라고 말하자 곧바로 폰 너머로 “안녕하세요? 고모, 저 00이에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웬일이야? 잘 지내?”

“네~ 고모 어떻게 지내세요?”

“고모 케냐 갈 준비하고 있지? 우리 조카가 이렇게 전화를 하고 기특하네. 혹시 아빠가 전화하라고 한 거 아니야?” 라며 농담을 건네자 조카는 어색한 듯 웃었다.

어째 거나 20대 중반인 조카의 전화를 받으니 반가웠다. 그런데 웬 주책인가? 조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고모가 케냐에서 사느라고 조카들 챙기지 못해서 미안해. 너 고모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라고 말을 꺼내자 울컥하며 생각지 못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말문이 막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화기 너머에 있는 조카가 눈치를 채고 “고모가 저 어렸을 때 많이 놀아 주었잖아요.” 의젓하게 위로하는 목소리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찌 보면 가족의 일원인 나는 참으로 매정한 딸이면서 동생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서울에 있는 회사로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살던 지역을 떠나고 싶은 간절한 갈망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이른 나이에 직장생활을 하다가 신학교에 입학을 했고 1년 내내 교회와 선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물론 가족들이 사는 곳과 내가 활동하는 지역이 쉽게 오갈 수 있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의 삶에 우선순위는 가족이 아니었다.

부모님 회갑 잔치나 오빠들의 결혼식이 아닌 이상 가족들의 생일에는 함께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족들은 그런 나에 대한 기대감을 일찌감치 포기했는지, 나에게 이렇다 저렇다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밖으로 만 돌던 내가 결혼하기 전 두 해를 부모님 동네에 위치한 모교회로 주말마다 가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면 1주일 내내 선교회 사역으로 지친 몸을 끌고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죽은 시체처럼 늘어져 잠을 잤다. 내가 모교회를 가게 된 이유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아버지를 위해서였다. 혹시나 딸이 본인이 사는 동네 교회에 사역자로 봉사하게 되면 딸을 봐서라도 교회를 다니지 않을까라는 맘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금까지 교회를 나가시않는다.


막내 오빠가 연애하는 사람이 나의 중학교 동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학교 내내 같은 반이 아니었고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편했는지 모른다. 오빠의 아내가 된 새언니는 딸 둘을 낳고 힘든 유아 돌봄을 하고 있었다. 첫째 아이는 밥도 잘 먹고 성격이 무난했는데, 둘째 아이는 밥이며 잠도 잘 안 자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 껌딱지였다. 그런 둘째 딸과 전쟁을 하는 언니가 안쓰러웠는데 다행히도 첫째 조카가 나를 잘 따랐다. 당연히 나는 그 조카를 예뻐했고 교회 야외활동에 조카를 데리고 다녔다. 마치, 내 딸처럼 말이다. 조카는 피부가 유난히 뽀얗고 예의가 바르고 씩씩했다. 언니가 아이들 옷 입히는 센스가 남달라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카를 단장해서 데리고 오면 내 눈엔 조카가 너무 사랑스럽고 예뻤다. 그 조카가 다정스럽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결혼을 한 후에도 바쁜 선교활동을 이어갔다. 아이를 늦게 가질 계획을 할 정도로 일에 대한 열정이 컸다. 결혼 3년 만에 첫째 아이를 낳고 선교사 훈련을 받는 중에 둘째를 낳았다. 둘째를 출산하자마자 신혼집을 정리하고 선교지로 나올 준비를 정신없이 했다. 첫째 아이 30개월, 둘째 아이 6개월 그리고 갓 목사 안수를 받은 남편과 함께 케냐로 나오게 되었다. 그 이듬해 셋째 아이를 용감하게 케냐 보건소에서 낳았는데 지금 그 아이가 만 13살이 되어 가고 있다.

그동안 무엇이 그리 바쁘고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을까?

결혼 전에는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몸과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냈다. 몇 년 동안은 하루 4시간을 자기도 하고 숱한 날들을 밤새워 회의와 행사 준비를 하며 고단한 몸과 부족한 잠을 전철과 버스에서 채우기도 했다. 남편은 결혼을 하자마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선교사 훈련과 신학대학원을 다녔다. 물론 그때도 주중과 주말에는 가족끼리알콩달콩한 삶은 없었다.

한국에서 치열한 삶을 살다가 아프리카로 온 우리의 삶은 여유롭지는 않았다. 새로운 땅에서 녹록지 않는 생활로 아이들을 키우며 적응하며 사는 것이 쉽지 않았고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또한 버거웠다. 이 모든 것을 한국에 있는 가족은 알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다. 그래서 용감 한 척 나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왔는지 모른다.


식구들에게 무정하다 싶을 정도로 살아온 나를 받아준 곳은 가족이다.

짧은 한국 여정 속에서 여비에 보태 쓰라며 용돈을 챙겨준 사람, 케냐로 다시 돌아가는 조카들이 눈에 밟혀서 그랬던지 아이들 옷과 신발을 사라며 체크카드를 건네준 사람, 세 아이들이 좋아하는 치킨과 삼겹살을 사들고 온 사람들도 가족이었다. 그런 가족들의 따스함이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했는지 모른다. 감동의 보답으로 카톡 배달 선물에서 요즘 인기가 많은 치킨인 BHC를 양쪽 조카들에게 마구 쏘아 주었다.

사랑 그 아름다움은 무조건 주는 것, 받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소중함을 서로 확인하고 소통할 때 더 가치가 있는 것이리라.


추석이 다가온다.

양가 부모님에게 안부전화를 걸었다.

스마트 폰에 깔아 놓은 쿠팡에 들어가서 그동안 눈으로 쇼핑을 하며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선물을 확인하고 손가락으로 결제하기를 살짝 눌렀다. 한순간에 돈이 빠져나갔지만 마음은 뿌듯하고 풍성했다.

비싼 선물은 아니지만 해외에서 지내는 딸, 며느리가 양가 부모님에게 선물을 보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추석이 지나면 가을이 성큼 올 것이고 금방 초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그때를 위해 다시 쿠팡에 눈을 돌려 눈여겨본 어른 신용 겨울 조끼를 장바구니에 넣어 본다.

지금까지 가족들에게 받았던 많은 섬김과 사랑의 빚을 갚아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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