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는 담임선생님이나 교수님께 과제 검사를 받고, 직장 생활을 할 땐 해당 조직에서 성과평가를 한다. 물품 구매 후 예산집행을 위해서는 제대로 물품이 구매되었는지 검수검사조서를 받는다. 당연한 절차다.
가정으로 돌아가면 별도의 조서는 없지만, 가족 구성원의 동의를 받아 원하는 일을 하기도 하고, 배째라 우기기도 하며 여하튼 암묵적 동의하에 저마다 하고자 하는 것을 하며 살아간다. 다섯 살 아이도 다섯 살 만큼의 인생을 논할 자격이 있으며 요구할 권리도 있다.
더 성장해서는 붕어빵 같은 인생을 거부하고 각자의 개성을 찾아 마이웨이를 한다. 그렇다고 각자마다 선택한 길을 갈 때, 검사검수조서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어느 누가 감히 그러할 수 있겠는가.
‘이 길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야 다음 스텝을 갈 수 있으니 조서를 제출하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다. 하나님도 그렇게는 하지 않으시고 못하신다. 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책임뿐이다. 때론, 누가 답을 알려주면 참 좋겠다 싶으면서도 그 답이 나에게도 적용된다는 보장도 없다. 사람 손의 지문이 모두 다르듯이, 사는 방법도 길도 개성대로 천양지차다. 그러니 생각을 잘하고 자신있게 살면 된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고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간혹 나를 알게 된 지인들이 글을 보고 추궁을 한다. 매거진 이름도 monologue, 즉 나의 독백이다. 상대에게 한 말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한 말을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올린 것이다. 그렇다. 독백이면 혼자 할 것이지 왜 공개된 곳에다 했을꼬.
생각이 꽂히면 어디서건 긁적이다 마음을 가다듬었고, 또 지난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도 재정리했다. 스스로에 대한 다짐과 약속도 있었다. 브런치작가라는 타이틀은 있지만 스스로를 작가라고 생각할 만큼 글재주가 뛰어난 것도 아니다. 다만, 쓰고 싶었고 쓰고 싶고, 앞으로도 쓸 것이다. 내가 숨을 쉴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나의 글을 읽은 그들은 야구 투수처럼 온갖 질문들을 던져댄다. 그들에겐 관심일지 모르지만, 나에겐 부담이 다. 내 인생을 지켜볼 수는 있어도 내 인생에 개입할 권한을 그들에게 주지는 않았다. 심지어 내 글이라며 그들에게 읽으라고 갖다 바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떠한 책을 읽는지, 어디로 이사를 했는지, 그리고 내 사유의 원인이 된 배경은 무엇인지 등등… 수없이 묻는 그들에게서 마치 내 인생의 검사검수조서를 강요당하는 것만 같다.
“독백입니다. 모노로그(MONOLOGUE)…. “
나의 대답은 심플하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그들에게는 질문할 자유는 있고 내가 무언의 대답을 하면 되니 상관은 없지만 마음은 쓰인다. 해발 1,800미터 이상을 꼬불꼬불 올라가는 시골 버스에 멍하니 앉아그런 생각을 해본다. 육신의 삶이 다하고 난 후, 나의 의값과 행실이 적나라하게 기록된 내 인생 조서에 ‘이상 없음. 검수완료. 천국행’이라는 검수자 의견을 받을 수 있을까?
그저 내 삶과 일상이 담긴 글을 검수하듯 아무렇게나 던지는 질문조차도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데, 내 인생 총평은 어떠할까? 나의 생각과 그분의 생각은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는 것을 안다. 언제고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인생에 있어 하나님과 인간을 두 어구로 표현한다면 무엇인지 압니까?”
“너 문제, 나 답”
명답이다. 가보지 않은 인생길이라 스무고개처럼 하나하나 답을 맞히며 넘어가야 한다.
그래도 좋으신 그분은 묻는 것은 죄가 아니니, 끝없이 답해주신다. 그분 뜻대로 살 수 있기를 , 그리고 진실로 그분의 뜻을 이해하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하루하루 정말 예쁘고 선하게 그분 뜻대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