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저녁 전화벨이 울린다. "송아, 엄마 면접 합격했어!"
전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가 명랑하다. 아빠와 함께 양복 재단 일을 하던 엄마는 최근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다. 병원 장례식장의 청소부로 고용된 그녀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구한 새 직장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괜찮겠냐며 걱정하는 내게 집 청소도 매일 하는데 그 청소 뭐라고, 하나도 어렵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 신다.
엄마의 목소리는 그저 해맑았지만 내 마음은 흐림이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진다. 내가 좀 더 돈을 많이 벌었다면 엄마가 덜 고생할 텐데. 나를 키우는 내도록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좀 더 가진 게 많았다면 자식들 고생 덜 시킬 텐데 하는 마음. 나이가 들수록 고마움과 미안함이 같이 상승곡선을 탄다.
엄마가 편안한 환경에서 일했으면. 아니, 평생을 고생만 한 엄마가 이제는 좀 쉬시면 좋겠다. 엄마 아빠 노후를 편안하게, 동생들은 넉넉히 독립해 삶을 꾸리게 하고 싶다. 감당할 수 없는 바람은 소리 없는 기도가 될 뿐이다.
허황된 마음인 줄 알면서 매주 로또를 산다. 당첨되면 가족의 빚부터 갚고 함께 나눌 거란 생각을 하면서. 미소에게 이런 말을 했다가 된통 혼나기도 했다. 언니 삶도 있는데 왜 그렇게까지 가족을 걱정하느냐고. 미소의 쓴소리에 네 말이 맞다며 맞장구를 쳤지만 그녀의 절절한 애정에 더더욱 결심하고야 만다. 당첨만 된다면!
단순히 가난 때문에 온 슬픔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돈으로 해결 가능한 슬픔에 대해.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불편한 거라고 했던가. 맞다. 조금 울 일이 많아질 뿐이었다.
IMF가 터져 엄마의 신발공장이 망했고 아빠는 일자리를 잃었다. 가난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몹시 다투고 울어가며 숱한 시간을 보냈다.
돈을 벌고 나서 가장 좋았던 건 가족들과 나눌 수 있어서였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어도 슬픔을 줄일 수 있는 건 확실했다. 줄어든 슬픔의 공간에 자주 웃음이 피어났다. 가끔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면 가슴 한편이 아리지만 우린 여느 때보다 안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첫 월급을 탄 엄마는 맛있는 저녁상을 차려냈다. 고슬고슬 잘 지은 밥을 나눠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엄마는 새 직장에서 만난 동료들이 잘해준다며 우릴 안심시켰다. 힘든 거 없다는 그녀의 눈 밑 그늘이 어쩐지 신경 쓰인다.
각자 몫의 짐을 나눠진 채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매주 로또는 꽝이지만 슬픔을 덜어낼 글은 쓸 수 있어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