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90
‘이별(離別)’은 ‘어떠한 존재 하고의 헤어짐’을 말한다. 이별은 주로 한쪽이 떠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자발적 이별과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별하는 경우가 있다. 이중 사랑하는 부부나 연인 사이의 이별은 둘 중 한쪽의 마음이 변하여 헤어지는 자발적 이별의 대표적 사례다. 한쪽의 변심으로 인한 부부의 이별은 어떤 분쟁이 발생해도 이혼 청구라는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연인 사이는 그런 장치가 없어 둘이 합의되지 않은 이별 통보에 많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랑의 이별은 상대에게 모욕을 주기 쉽고, 둘 사이의 사랑을 파괴한 상대로 지목되기 때문에 이별 후에도 잊지 못하고 스토킹이 발생하고, 나아가 비참하게 버려졌다는 생각에 이르면 심각한 폭력이나 범죄로 이어진다. 심심찮게 뉴스에 오르내리는 연인의 살인 사건은 빗나간 사랑의 끝이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지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래도 한때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미움이 상대를 죽일 만큼 큰 것인가 하는 의구심까지.
우리는 날마다 이별하며 살아갑니다. 지금, 이 순간도 시간과 이별하고, 사람과 이별하고, 사랑과 이별하고, 성공과 실패와 이별한다. 이별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별로 인한 상처가 쌓이고, 또 쌓여서 고통으로 다가온다.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이 사라지는데, 이별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별의 고통은 사랑의 깊이와 비례한다.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이별의 고통이 큰 것이다. 이별의 슬픔이 새로운 기쁨으로 다가오기를 믿고 살 뿐이다.
영원히 함께할 것 같은 사랑도 언젠가 이별의 순간이 찾아온다. 원래 혼자였던 내가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이별은 죽음으로 인한 이별과 다르다. 사랑하다가 헤어진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관계의 끊어짐이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나 부부의 사별이라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장례가 진행되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겪지만, 이별의 절차는 간단하고 짧다. 죽음의 이별이 쉽게 잊히는 이유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둘 사이의 관계가 끊어진 뒤에도 각자의 삶이 계속된다. 죽음의 이별보다 아픔은 덜하지만 잊기는 더 어렵다. 사랑의 이별은 헤어지는 절차보다 망각의 훈련이 더 필요하다.
사랑과 이별은 동전의 양면으로 ‘사랑이 있으니 이별이 있다.’라는 말은 긍정하기 싫지만 진실이다. 아무리 뜨겁고 열열했던 사랑도 시간을 이기는 장사 없다. 과일에 씨앗이 박혀 있듯이 모든 사랑에는 이별이 숨어 있다. 숨겨진 씨앗이 새싹을 틔우듯 숨겨진 이별이 있어 새로운 사랑이 싹트게 한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사랑하고 이별하고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우리 인간이 죽음을 거부하지 못하듯, 사랑도 이별을 거부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랑은 서로의 의미로 다가왔다가 잊힌 의미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게 삶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남겨 놓은 상실감을 버려야 한다. 기다리면 언젠가는 사랑이 다시 올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빨리 버려야 한다. 망각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자기 잘못을 끝없이 후회하면서 실의에 빠져 세월을 보내는 사람은 새 사랑을 맞이할 수 없다. 활력과 생명력으로 사랑에 실패해도 또 다른 사랑을 갈망한다면 꿈을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사이에 이별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사랑은 언제나 한 줌의 의심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의 최대 적은 ‘의심(疑心)’이라는 것을 꼭 배운 후에 사랑에 빠져야 이별의 아픔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이다. 믿음이 사랑을 튼튼히 지탱해주는 최대의 받침돌이다. 그래 정채봉의 『사랑을 위하여』란 시에서 ‘사랑의 암균은 의심, 사랑의 항암제는 믿음’이라고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혹은 무의식적으로든 이별을, 그것도 아주 감상적이고 슬픈 이별을 동경한다. 슬픈 이별의 사랑 노래 중에 명곡이 많은 것도, 사랑의 이별 소설 중에 명작이 많은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우리의 이별 대신 노래가, 소설이 대신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실제 감상적인 이별을 꿈꾸는 모든 연인을 위해 예술이 대신해준다. 우리 대신 아픈 이별을 대신해주는 것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사랑하는 사이에 마음으로는 끝없이 이별의 이유를 찾으면서도 막상 이별하게 될 것 같으면 다시 매달리는 경우가 있다. 혼자 남게 되는 이별의 두려움 때문에, 차라리 어떠한 어려움을 감수하고라도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많은 것을 희생한다. 심지어 자기 삶마저 팽개치는 경우도 흔하다. 이별의 고통을 피하기 위한 끔찍한 사랑의 굴레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내가 가진 사랑 하나를 얻음으로써 다른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사실 사랑은 많은 것을 버리는 상실의 위험을 무릅쓰고 쌓아 올린다. 그래서 더 소중하고 절절한 사랑, 사랑했으므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랑이다. 그래 사랑의 이면에는 상실의 이별도 함께 있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이에 이상적인 이별은 있는가? 있다면 어떤 이별이 상처받지 않고, 또 다른 사랑의 씨앗이 되는가. 이성의 만남과 이별이 너무 가볍게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이별은 단순히 사랑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는 사랑 여행일 수 있다. 살면서 꼭 겪어야 할 단계이고 관계의 변화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힘들더라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헤어진 연인과의 재회를 위해서 노력하기보다 새로운 연인을 찾아 나서는 것이 현명하다. 지나간 사랑의 빈자리는 새로운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다. 자기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 스스로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 헤어진 상대만 무작정 그리워한다면 더욱 힘들어질 뿐이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천천히 극복해나가는 것이 좋다.
이별의 고통 중에 죽음 다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가장 크다. 아무것도 사랑의 상실을 위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이별의 고통이 따라오기 마련이고 사랑했던 만큼 고통도 더 크지만, 이별에 대한 각오도 함께 해야 한다. 아침에 만난 사람과 저녁에 헤어지는 것처럼 이별은 삶의 일부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다.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기쁨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이별과 고통도 함께 주기 때문에 그 관계에 모든 걸 거는 것은 위험하다. 당연히 사랑의 결과는 행복해야 하는 것이고, 행복이란 나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이지, 상대방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이별한 상대에게 매몰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삶은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불행의 늪에 빠질 뿐이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사람과 사물을 소유하고 사랑하도록 만들어졌다. 따라서 살아가면서 늘 무언가를 얻고 잃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미 얻었던 사람, 물건, 사랑, 추억, 나 자신 등 많은 것들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모든 상실이 이별에서 시작된다. 이별의 상실감을 극복하는 것이 흔들리는 삶의 소용돌이에 맞서는 것이다. 모든 일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이별에 의한 사랑의 종말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만, 사랑이 주는 기쁨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멋진 일이다. 다만, 우리는 사랑이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랑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가 저절로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싫지만 인정해야 한다. 사랑의 이별을 잘 극복하기 위해서 이별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고, 이별은 비극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적인 하나의 단면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관계를 할 때 내가 실망하지 않는 최고의 방법은 상대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말고, 해줄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줄 수 있는 것을 요구해야 한다.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 비결이다. 절대 사랑 따위로 자신을 파멸시키도록 내버려 두지 말고.
‘사랑은 묘약, 이별은 명약’이란 말이 있다. 사랑의 묘약에 취해 정신 못 차리고 헤매는 인간에게 최고의 치료 묘약이 이별이란 말 아닌가.
사랑의 묘약에 취하지 말고, 헤어짐은 이별의 명약으로 치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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