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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Apr 24. 2022

녹담만설의 전설을 함부로 오른 결과!!!

#성판악 코스 #한라산 등반 #백록담 #고생 끝에 전우애 #추억 만들기

백록담의 턱밑에 이르자 빗줄기는 가늘어질 줄 몰랐다. 하늘문이 열린 것처럼 탁 트인 사방에서 몰아치는 칼바람은 비에 젖은 내 옷섶을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고,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해발 고도 차이에 따른 기온과 바람이 이 정도로 컸던가? 가파른 나무계단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순식간에 얼음 슬러쉬로 변했다. 녹담만설(鹿潭晩雪)의 전설처럼 4월 하순인데도 불구하고 백록담 탐방로 주변은 바람길 모양대로 눈이 엉킨 식물군들이 거센 비바람에도 꼿꼿이 그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흰 사슴을 탄 신선이 물을 마셨다는 백록담은 한라산 정상의 산정화구이다. 겨울 한라산의 설경은 길면 봄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 한라산 백록담에 하얀 눈밭이 남아 있을 때 그 주변과 산 아래로는 유채꽃과 벚꽃이 피어 봄과 겨울이 공존하는 듯한 모습은 ‘녹담만설(鹿潭晩雪)’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제주의 가장 아름다운 자연경관 12곳을 이르는 영주십이경(瀛州十二景) 중 하나이기도 하다.  ('녹담만설' 한라산의 첫눈과 끝눈 이야기, HanSH)


웬만한 봄비는 그냥 맞고 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탓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백록담 정상에서 맞닥뜨린 거센 비바람은 나의 모든 이성과 육신까지 마비시켰다. 입구부터 맞은 비로 온몸이 흠뻑 젖었는 데다 한라산 정상 부근에서 몰아치는 칼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설상가상으로 저체온증 증세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근까지 봄기운이 완연해 그냥 여름 반팔 티셔츠에 바람막이 점퍼 정도만 걸친 채 영험하다고 소문난 한라산 등반을 도전한 게 이 정도로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체력 하나는 그래도 자신 있다고 자신했던 나도 이 정도인데 평소 집순이를 자처하며 인근 야산을 오르기도 싫어하는 내 짝꿍은 상태가 훨씬 심했다. 흠뻑 젖은 옷, 창백한 얼굴, 시퍼런 입술, 떨리는 이까지 심각한 저체온증 증세를 보였다. 헬게이트가 열린 것 같았다. 


눈쌓인 식물군락지 / 얼음 슬러쉬로 변한 빗줄기 / 마지막 스퍼트를 하는 내 짝궁

 

한겨울과 같은 세한의 시간을 체험한 우리 부부가 안간힘을 내서 도착한 백록담은 짙은 산안개로 그 웅장하고 영험한 자태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5분 전까지 백록담이 보였는데 아쉽네요."라고 말한 옆 등산객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귀에 박혔지만 하늘이 허락해야만 볼 수 있다는 백록담을 보지 못한 게 내심 섭섭할 뿐이었다. 언 손으로 겨우 휴대폰 잠금 화면을 해제한 후 백록담 표지석에 나란히 서서 셀카 인증샷을 눌러 그날의 대장정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욕심을 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린 다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올라올 때는 백록담을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든 걸 감내할 수 있었지만 내려가는 길은 완전히 달랐다. 추위와 저체온증, 그리고 긴장이 풀린 탓인지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이 펼쳐졌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가 야속하기만 했다. 젖은 돌길을 내려가는 발검음도 돌의 무게처럼 묵직하게 느껴졌다. 너무도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려가는 짝꿍의 보조를 맞춰서 내려가다 보니 한 번도 아팠던 적이 없던 무릎이 갑자기 시큰거렸다. 박 바닥도 부르텄고, 허리도 빳빳해지고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몸이 젖어 추운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안전사고가 나지 않는 게 중요했다. 한걸음 한걸음 젖을 돌길 위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짝꿍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그녀 곁을 계속 지키고 맴돌았다. 돌아오는 길은 왜 그리도 낯설고 멀기만 한지.....(내 사랑 내 곁에) 내려오는 길 또한 주변에 보이는 건 울창한 나무와 조릿대뿐이었다. 


백록담 표지석과 나무 표지판에서 기념 촬영 / 신이 허락하지 않은 백록담


저 멀리 진달래 대피소가 보였다. 우린 급한 용무를 우선 해소한 후 대피소에 들어가 처음으로 배낭에 싸 가지고 간 음식을 꺼내서 먹기 시작했다. 저체온증을 극복하기 위해선 열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앉아 있으니 저체온증이 다시 오기 시작했다. 먹자마자 우린 서둘러 하산을 위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 혼자였다면 벌써 주차장 입구까지 도달했으리라. 오늘 등반의 목적은 짝꿍과 함께 완주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우린 마지막까지 호흡과 보조를 맞추어야만 했다. 


속밭 대피소까지 내려오자 심신이 한결 가벼워졌다. 군대 행군 시 장교나 하사관이 하는 선한 거짓말처럼 다 와 간다며 몇 차례나 짝꿍을 독려했지만 짝꿍은 고난의 행군 보병처럼 내 말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고진감래 속담처럼 우린 마침내 성판악 주차장에 도착했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았고, 우린 흠뻑 젖은 옷을 털지도 않은 채 차에 탑승했다. 


숙소로 가는 내내 짝꿍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너무 춥고, 이가 덜덜 떨리고, 정신이 없어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서로 말없이 차를 운전하는 동안 난 왜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까지 한라산 등반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되었다. 


내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퇴직 후 삶의 방향성을 잃고 헤매는 나를 위해 힘들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와 함께 한라산 등반을 완주함으로써 인생이막의 여정에선 서로 함께 의지하고, 함께 헤쳐나가는 짝꿍의 깊은 배려와 행동의 메시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힘들면 늘 외치는 말처럼 인생 뭐 별거 있나? 어떻게든 출발하면 도착하는 게 인생 아니던가?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특히 퇴직 후 부부는 말이다. 


우의를 쓴 모커플 / 멈추지 않는 빗줄기와 추위로 떨고 있는 내 짝꿍 / 끝이 보이지 않는 나무계단 길


[한라산 여정 Summary]


43,889보! 왕복 19.2km! 왕복 시간 7시간 40분! (9시간 왕복 코스임)


새벽 4시에 기상, 4시 40분경 출발, 5시 14분 성판악 주차장 도착. 78대만 주차가 가능해 일찍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전 정보에 채비를 서둘렀음. 결국 주차 성공. 5시 30분부터 입장. QR코드 찍은 후 입구 통과. 30분쯤 지나니 여명이 밝아옴. 5km 구간은 다소 평탄. 해발 1,000m 경과 지점부터 빗줄기 내리기 시작.


올라가면서 시작한 빗줄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 거세짐. 일기예보상 1~4mm 정도 내리고 그친다고 했는데 완전 해삼, 멍게, 말미잘...... 사기 예보였음. 혹시 우리가 하산한 후에 거짓말처럼 해가 짱짱할 거라고 투덜거렸는데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 숙소에 도착하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해 짱짱 ㅠㅠ


성판악 주차장에서 산뜻하게 출발! 이 때까지만 해도 기분 산뜻!
내려올 때 발견한 고라니(사슴?). 사람을 겁내지 않는 게 신기했음.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난 샤워기 물을 틀어 온수가 나오도록 한 후 짝꿍부터 들어가 체온을 녹이도록 선 조치했다. 사실 난 30년 전 군대로 갔다 왔는데 이 정도의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하기엔 나도 너무 추웠다. 아내에게 SOS를 보낸 후 샤워실로 뛰쳐 들어갔다. 오랜만에 적과의 동반 샤워가 이뤄졌다. ^^; 


이 보다 더 행복하고 좋을 수 없었다.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일까? 샤워가 끝난 후 우린 사이좋게 준비해 놓은 파스와 야몽 크림을 온몸 구석구석 서로 발라주었다. 이렇게 많이 발라본 적은 처음이었다. 샤워도 끝나고, 크림도 바르고 나니 생리적 배고픔이 찾아왔다. 나가서 먹기도 힘이 들어 우린 집 앞 반점에 탕수육을 한 개 주문한 후 포장해 왔다. 


일단 뭐든지 먹어야 했다. 우린 냉장고에서 제주XX맥주를 꺼내서 오늘 힘든 여정 완수를 서로 축하하고 자축하면서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맥주와 탕수육이 동이 났다. 부족한 2%는 라면으로 해결했다. 김치를 듬뿍 넣어 칼칼하게 국물을 우려냈다. 한국사람에겐 라면만큼 심리적 허기를 달랠만한 음식은 없는 것 같다. 배도 부르고 술을 먹어 몸도 이완되니 졸음이 찾아왔다. 착한 어린이는 이부터 닦아야 한다. 우리 둘은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탐라가 품은 민족의 영산이자 성산인 '녹담만설(鹿潭晩雪)의 전설'을 함부로 오르면 안 되는 이유를 우리 부부 등반 여정을 통해 누구보다 잘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한라산은 '백두에서 한라까지'란 말에서 보듯이 한민족의 영역 범위를 표현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한라산은 정복하기 위한 산이라기보다는 한반도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영산의 이미지가 강한 산이다. 


얼마 전 제주민속박물관에서 탐라 건국의 신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탐라를 창조한 설문대할망의 전설, 그리고 고을나(고씨), 부을나(부씨), 양을나(양씨) 삼신인이 땅(삼성혈)에서 용출해 자라나서 수렵생활을 하던 중 오곡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벽랑국 심공주와 혼인하면서 정착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농경사회로 발전하면서 백성이 많아지고 부유해져 탐라국을 건설했다고 한다. 


** 연혼포 : 오곡의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벽랑국의 세 공주를 맞이한 해변

** 혼인지 : 삼신인이 세 공주와 혼례를 올리고 목욕재계를 한 연못

** 신방굴 : 삼신인이 세 공주와 신방을 꾸민 굴

** 삼사석 : 삼신이 도읍을 정하려고 화살을 쏘아 맞춘 세 개의 돌

** 사시장올악 : 삼신이 도읍을 정하려고 활을 쏜 봉우리(오름)


아무리 봄기운이 완연해져도 한라산은 한라산이다(남한의 가장 높은 산이다). 산을 오르기 전에 반드시 날씨와 기온을 확인해 그에 맞는 옷과 장비를 준비해야만 한다. 특히 장시간 등반을 하고 고산지대로 오르다 보면 아무리 날씨가 따뜻해도 추위를 느낄 수밖에 없다. 등반을 하면서 옷 여려 벌을 챙겨가서 상황에 맞게 입고 벗고를 하는 걸 추천한다. 


특히 비가 올 때는 가급적 등반을 자제하길 권한다. 위험하기도 하지만 9시간 이상 장시간 등반을 하기 때문에 체력 저하와 저체온증이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등반로에 돌이 많기 때문에 등산화를 준비하면 좋겠다. 스틱은 주변 등산객에게 피해를 줄 수는 있으나 몸의 균형이 필요한 분들은 구비하면 좋을 것 같다. 또한 체온 저하와 체력 감소를 위한 먹거리도 적절하게 준비해야 한다. 체력이 완등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 커플이 백록담을 못 본 건 천추의 한으로 남겠지만 여정 내내 세한의 시간을 견디고 극복하면서 오랜만에 부부간 전우애를 싹 틔울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더불어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내 짝꿍에게 남은 여생 동안 더 이상의 한라산 등반은 절대 없을 거란 부작용도 있지만 말이다. ㅠㅠ  


평생 나와 자식들 뒷바라지한다고 고생만 했던 내 짝꿍에게 다시 한번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기대보다 너무 잘해주었다고 말이다. 남은 탐라 한달살이 기간에는 다시는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그리고 앞으론 돌길보다 꽃길만 걸어보자고. 마지막으로 녹담만설의 전설을 함부로 오른 결과는.......(두구두구) 돈독히 쌓인 전우애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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